[경성육담] “가슴 만져도 돼요?”

| 문계린

어떤 헤테로섹슈얼 연인의 이야기다. 성교 도중 여성이 남성 위로 올라가자, 다시 말해 기승위를 취하자, 아래에 있던 남성이 “춤춰 봐.”라 말했다 한다. 베갯머리에서 하는 말치고는 퍽 품격 있는 은유다. 이는 나츠메 소세키가 “I love you.”를 어찌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사랑해요.” 대신 “달이 참 밝네요.”를 고른 것과 비슷하다. 에두르고 눙치면서 은근한 말들. 시간이 흐르면서 직설이 파격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은유가 고전이 되었지만 그 힘은 여전하다.

달콤하고 시적인 말뿐 아니다. 이런 일상 속 은유는 곳곳에 숨어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자신을 집 앞까지 바래다준 남자에게 “라면 먹을래요?”라 말한 것을 떠올려 보자. “나는 지금 당신과 내 방에서 성교하고, 당신과 함께 아침에 일어나고 싶어요.”를 여섯 음절로 함축했다. 어느 벗의 독해를 따르면 “라면 먹고 갈래요?”가 아닌 게 포인트다. 가긴 어딜 가! 이처럼 집에 끌어들일 구실을 만들면서 너무 노골적이지는 않은 것이 성애에 쓰이는 암호다.

물론 이런 말들은 화자가 바라는 것을 적확하게 명시하지 않기에 때로 문제가 된다. 이제는 상투구가 된 “오빠 믿지?”가 대표적인 예다.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지 도통 알 수 없지만 관계의 신뢰성을 들먹이며 화자가 원하는 것을 내달라는 어떤 태도들. 이런 말의 암시는 행위의 암시로 번진다.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행위 속 암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성폭력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우리가 소통이라 믿는 것은 대개 통밥 굴려 상대의 언행 속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성폭력이고 어디까지가 성폭력이 아닌지, 그 구분은 불분명하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사용하는 단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동의 없이 성교하는 것만을, 누군가는 성적 수치심을 주고 성별권력을 강조하여 위압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성폭력이라 부른다. 성폭력의 정의를 줄줄 외우고 다녀도 말끔하게 똑 떨어지는 답안이 나오기는 어렵다.

그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돌직구’를 던질 수도 있다. “손 잡아도 돼요?”, “키스해도 되나요?”, “가슴 만져도 돼요?” 단계가 올라 갈 때마다 매번 물어보는 것이다. 그런 시도는 20년 전쯤에도 있었다. 1993년, 미국 오하이오주 앤티오크 대학에서는 성행위 규제 헌장을 공포했다. “당신은 과정의 각 단계마다 동의를 얻어야 한다……(중략)……당신이 그녀의 유방을 만지고 싶으면 당신은 그녀에게 그것을 물어보아야 한다.” 이대로 한다면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상호 합의를 전제로 모든 행위를 어떻게 할 것인지, 매우 명확하게 규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연애를 비롯한 성애 전체를 문서화 가능한 계약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였다.

다만 우리는 이것이 실패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저 준칙이 공포된 지 20년 가까이 지난 세상은 전혀 저렇지 않다. 여전히 “집에서 한잔 더 할래요?”가 유효한 멘트다. 성애에 따르는 암묵적인 코드는 일상에 운치를 더한다. 행위 속 암시의 낭만은 성애의 흥을 돋우는 좋은 향신료다. 반드시 일상을 명료하고 확고하게 통제해야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이렇듯 우리는 말과 행동이라는 매우 불편한 방식으로 소통하기에, 암시로 이루어진 가•불가의 신호는 상대에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면 열심히 상대의 눈치를 보거나 성실하게 차근차근 물어야 한다. 답이 없는, 그리고 매번 다른 주관식 문제다. 더불어 그때그때 다른 감정을 따라가기도 어렵다. 동의하는 사실을 녹음하더라도 그것의 신빙성은 누가 증명할 것인가? 성애의 계약이 강압이라 주장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냥 “가슴 만져도 돼요?”해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입을 맞추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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