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


| 명교 (돌곶이 포럼)

안철수가 지난 9월에 있었던 그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SF소설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언급한 이래 그의 소설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퍼져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매력적인 인용구가 부지불식간에 일간신문의 정치면을 장식했다. 안철수는 깁슨의 이 비의적 잠언을 빌려 자신이 밀고 있는 ‘혁신 경영’의 이미지를 알리려 했던 모양이다.

과거 ‘혁신’의 이미지는 소위 사회주의자들의 차지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와 정반대다. 2000년대부터 우후죽순격으로 출간된 무수한 혁신 경영의 사례를 담은 책들의 집대성 같은 존재인 안철수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혁신’은 오늘날 좌파 대신 ‘혁신’의 이미지를 거머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대표 슬로건이다. 경제적으로는 철저히 자본주의 착취구조를 안착시키기 위해 복무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진보’나 ‘혁신’ 따위의 이미지를 거머쥔 산업시장의 전문가들이 바로 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다.경제전문가를 임용한다며 장하성 교수나 이헌재 전 금감원장 같은 주주자본주의 금융화 이론가들을 임용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경제민주화론’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안철수가 우리 사회의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자기계발 교훈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면 이 훌륭한 멘토의 등장을 구세주처럼 반길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경제위기에 임박해 자본주의 시스템 작동의 가부를 위협 받고 있는 지금, 어떤 훌륭한 오너 한 명이 할리우드 영화의 슈퍼히어로처럼 세상을 바로잡아줄 만큼 단순한 세상이었다면 이미 세상은 몇 번쯤 혁명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우리를 끊임없이 배제에 대한 공포와 경쟁 속으로 밀어넣는 것은 다름 아닌 경제위기이다. 이 위기의 근원은 전 세계적으로 펼쳐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지, 게임의 룰을 바로잡는다고 해서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뜯어 고쳐야 할 것은 게임의 룰 그 자체다.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자기계발을 반복한들 점점 더 치열한 경쟁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지독한 경쟁의 룰 안에서 살고 있는, 노동조합 등 자기-통치의 무기를 쥐지 못한 ‘몫 없는 자들’이 함께 뭉치고 저항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정치를 펼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법정 최저임금에 가까운 임금을 받으면서도 온갖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일해 온 청소노동자들은 저 유명한 신자유주의적 ‘혁신 경영’의 기치에 따라 내년부터는 미화원 점수제를 시행하겠다는 방침을 들었다. 일을 열심히 잘하는 사람에겐 시급을 올려주고, 그렇지 않은 노동자는 과감히 자르겠다는 것이 그 혁신 방침의 기본 취지였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 않은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많은 일터에서 자행된 연봉제, 정리해고제, 간접고용, 경쟁적 시스템이 전면화된 것이다.

오늘날 몫 없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혁신 경영’인가? 아니면 단결과 연대인가? 5년 전 한국 사회의 ‘표준시민’들은 무너지지 않을 중산층의 꿈을 뉴타운 신화의 정치가에게 담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뉴타운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파괴였다. 안철수가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줄줄이 실패한 전직 대통령들의 역사의 산물이자 정당정치마저 붕괴된 위기의 산물이자 그 지루한 반복이 맞다면, 경제위기 속에서 삶의 전망을 찾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변화될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두 달여의 공장 밖 농성을 마치고 일터로 복귀한 SJM 안산공장의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용역깡패를 동원해 노동자들을 두드려 패고 직장폐쇄로 공장에서 내쫓은 사측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포기하기를 종용했다. 세간의 흔한 선택지라면 SJM의 노동자들도 내부적으론 분열하고 노동조합을 통한 저항은 포기하길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선택한 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단결하고 싸우며, 지역사회의 노동자, 시민들과 연대하는 것이었다. 결국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싸움처럼 보였던 이 싸움은 기적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는 노동조합이 없는 불안정한 일터에서 일하는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아마도 우리는 함께 뭉쳐 싸우기보다는 서로 경쟁하고 다투어 1등을 정하고 낙오자는 추락하는 질서에 익숙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게임의 룰이 아무리 공정한들 결국 우리에게 정치적 무기를 쥐여주지 않는 정치란 결국 가짜 정치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저 SJM 노동자들이나 노동조합을 결성한 청소노동자들처럼 일하는 과정에서 겪는 자신의 억압과 모순을 스스로의 단결과 저항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2004년 고려대 청소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한 이래 그 ‘기적’은 노동자운동이 엄청난 위기에 도래한 오늘에도 서울시내 곳곳으로 퍼지고 있다. 만약 윌리엄 깁슨의 저 훌륭한 경구의 진짜 주인이 “이미 도래한 미래”처럼 우리에게 와 있다면, 그 몫은 바로 안철수나 박근혜, 문재인 같은 영웅적 정치인으로부터가 아니라 단결하고 저항하는 사람들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미래를 더 알리고 확산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지금부터는 우리 주위와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기적처럼 우리 자신을 구원할 ‘사건’을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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