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그 많던 ‘최고공감’은 다 어디 갔을까?


| 덕배

조선시대 태종임금은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해주기 위해서 궐밖에 ‘신문고’라는 북을 달았다고 한다. 이 제도는 백성들의 뜻을 위로 신속하게 끌어올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 귀한 뜻을 우리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에 현재 정부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해 ‘국민신문고’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신문고를 보면서 국정에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전자민주주의를 떠올린다. 중앙대에도 이런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 고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중앙인 커뮤니티의 ‘최고공감’이다.

억울한 자 북을 쳐라!

이제는 중앙인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신문고를 울릴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중앙대의 가장 유력한 매체인 ‘중대신문’이 의제화하지 못하는 것들을 최고공감이 의제로 만들어 내는 것을 목격한다. 오갈 데 없었던 민원들, 학교를 다니며 느끼는 소소한 불편들이 게시판에 올라오고 학우들의 추천을 받아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직접민주주의가 인터넷 공간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최고공감’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다시 조선시대를 떠올려 보자. 그 옛날 신문고가 절실했던 이유는 오늘날 중앙대에서도 똑같이 유지되고 있다. 왕과 사대부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신문고조차 없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당장 내가 신문고를 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시원하게 북을 쳐볼 수 있다는 희망은 얼마나 달콤했겠는가. 아마 궐밖에 사는 백성들은 대문을 지나면서 신문고를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칠 수 있다. 내 문제를 나랏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다.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민란이 끊이질 않았을 것이다.

“이사장님이 보고 계셔”

우리의 처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학교를 다니다가 억울한 일이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교 행정과 관련해 겪은 불편들, 수업권의 침해, 교육환경에 대한 불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말이다. 자, 해답을 찾아보자. 첫 번째 해결책은 교직원을 만나 호소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해결책은 최고공감을 통해서 교직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세 번째 해결책은 해결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시대 백성들도 똑같았다. 고을 사또에게 읍소하고 볼기짝을 얻어 맞거나, 신문고를 쳤다가 볼기짝을 얻어 맞거나, 그냥 참고 살거나.

조선과 중앙대, 그 본질적인 공통점은 해결의 주체가 백성(학생)이 아니라 관리자거나 관료라는 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읍소하거나, 부탁하거나, 더 높은 관리자에게 일러바치는 것뿐이다. 중앙인에서 우리는 종종 “이사장님 봐주십시오!”라는 제목을 발견한다. 이래서 어디 공화국의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학교 밖에서는 주권을 가진 시민이었다가 학교 안에 들어서는 순간 궐밖의 백성이 된다. 최고공감에 올라가면 뭔가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우리는 학교 안에서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붙잡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희망고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민주주의는 희망고문이 아니다

지난 호 잠망경이 나오고 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글들이 최고공감을 스쳐 지나갔다. 개강 직후에는 역시 수업권 침해 문제가 가장 주된 이슈였다. “이럴 거면 복수전공을 의무화하지 말라”거나 “들을 수업이 없어서 답답하다”거나 “수업 정원이 너무 많다”는 내용이 주로 올라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학교는 묵묵부답이었다. 세월 앞에서 최고공감은 덧없다. 기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최고공감에서 성토 글이 사라지고 나자 학생들은 체념했다. 이번 학기도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이제는 학내에서 대자보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그 촌스러운 걸 왜 붙이나, 미관상 좋지도 않은 것을! 대자보가 없어도, 학내 집회가 없어도 우리에게 희망은 여전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와이파이가 안 터져요”라고 글을 올리면 한 시간만에 교직원이 댓글을 달아준다.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고 말이다. 아, 어쩌면 해결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 후에 올라온 것은 “대학원 장학금 지급 기준”과 관련된 문제였다. 대학원에서 성적우수 장학금 수여를 위한 자격요건에 “중앙일보 대학평가 기준, 본교보다 상위대학 학부 출신”이라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얼굴을 붉혔다. “교육기관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냐”, “학벌주의를 대놓고 조장한다”는 글들이 빗발쳤다. 아니, 그런데 이번에는 학교가 반응을 보였다. 공지사항에 관련 해명 글이 올라온 것이다. 역시, 중앙대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느낄만 하다. 공지 글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지사항에는 우리들이 올린 ‘동문’에 대한 ‘서답’이 실려있었다. “타교 출신 대학원생의 장학금 수혜 기회가 박탈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어? 우리가 부끄러워 한 건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 후에 조용히 대학원 규정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만세! 민주주의 만세!

그 외에도 ‘교육 조교’의 처우 문제, ‘도서관 운영 문제’, ‘학내 소음 문제’, ‘흡연 구역 지정 문제’ 등의 수많은 의제들이 여론의 급물살을 탔다. 어떤 것은 고쳐지고 어떤 것은 방치됐다. 이쯤에서 우리는 학교측의 민원 대응 방식이 ‘추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추측하게 된다. 최고공감에 올라가는 건 마음대로였지만 다 해결되는 건 아니란다. 학교 본부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행정적 조치를 강화하는 데는 학생들의 여론을 따른다. 와이파이 고치고, 고시반 성적 올리고, 대학 평가 잘 받는 데는 우리의 건의사항이 충분한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수업 시수 늘리고, 수업 정원 줄이고, 도서관의 책을 늘리는 데 학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학교 발전과 학생들의 배울 권리는 본래 충돌하는 것이 아닐텐데, 우리의 관리자들은 자꾸만 지금 우리가 좀 더 참아야 학교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민원이 아닌 정치로 해결하라

민주주의 사회는 시민들을 다시 봉건제 하의 백성으로 돌려놓지 않기 위해서 몇 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거의 까먹고 살지만, 사실 중앙대에도 그런 장치가 있긴 하다. 바로 총학생회다. 학생이 직접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보장된 민주적인 정치기구다. 그런데 올해 총학생회는 스스로에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리고서야 당선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현 총학생회의 당선 비결은 ‘그 어떤 정치적인 행위도 하지 않겠다’는 공약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총학생회는 당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있어도 없는 척, 봐도 못 본 척 하고 살아왔다. 식물총학이라는 비난은 이제 하도 들어서 지겹다.

총학생회도 학교의 편향성에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교육여건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면서 학생들에게 선물도 주고 연애도 시켜주고 축제를 성대하게 열면 괜찮다고 여기고 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직접 결정하게 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교직원들이 우리의 부탁을 좀 더 잘 들어주게 할지를 고민한다. 식물총학은 이제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다. 식물총학은 곧 ‘모두를 위한’ 총학이며, 학생들을 위해 학교와 맞서는 총학은 ‘그들만의’ 총학이니 말이다. 학생 스스로가 학교에서 ‘시민권’을 포기한 중앙대에서 우리는 자꾸만 전 근대의 향기를 맡고 있다.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보자. 조선시대의 신문고도 최고공감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편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상관을 고발할 수 없었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할 수 없었다. 중앙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업권과 관련된 건의는 해봤자고, 교육여건과 관련된 건의는 끝없이 미래로 해결이 연기된다. 신문고를 울려도 되는 지극히 억울한 일들은 이제 몇 가지 남지 않았다. 오늘 나를 불쾌하게 한 교직원에 대한 것이거나, 이미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학교 운영에 반하지 않는 것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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