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우리에게 더 많은 광장을!

gwangjang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

지난 4월 4일 새벽, 대한문 앞에 쌍용자동차 국정조사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차려진 분향소를 서울시 중구청이 기습 철거했다. 분향소는 정리해고와 폭력적인 파업 진압 이후에 세상을 등진 스물네 명 노동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중구청은 이를 뜯어낸 자리에는 흙을 붓고 화단을 설치했다. 지난 3월 3일 새벽에는 방화로 분향소가 전소되는 사건도 있었다. 경찰 조사에서 방화 용의자 안모 씨는 “지저분한 천막이 있어 불을 질렀다”라고 진술했다.
이 사건들은 공간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일반적 경향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지금, 생존을 위한 목소리를 시끄러운 소음이나 지저분한 쓰레기로 규정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의 절박한 요구보다 정돈된 푸르름을 원하는 사회, 이런 분위기에서 공간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파괴없이 창출되는 공간은 없다

중앙대로 돌아와 보자. 두산 재단이 들어오고 중앙대에는 대규모의 재단 전입금이 흘러들어왔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미뤄왔던 학내 공간 재편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 새롭게 생겨난 곳들이 많다. 정문 앞에 잔디밭과 새로운 R&D센터가 생겼고, 교양학관 앞에는 중앙마루가 생겼다. 청룡호수 주변이 깔끔하게 정돈됐다. 해방광장에는 나무와 벤치가 들어섰다. 물론 이 공간들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루이스 가든과 Y로, 의혈광장과 팔각정, 청룡호수 주변의 오래된 나무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공간의 창출은 반드시 기존 공간의 파괴를 동반한다. 분향소와 화단이 공존할 수 없듯 새로운 공간은 파괴에 대한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만 창출될 수 있다. 공간 변화에 대한 의사결정권이 누군가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공간을 이용할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공간은 만들어질 수 없다. 따라서 공간의 창출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표면적이고 명시적으로 적대를 드러내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정당화의 방식에서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것이 ‘미관’이라는 가치다.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공간을 위해서는 공간의 구체적 측면들을 소거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새롭게 생긴 공간들은 하나같이 단순해서 아름답다. 입학 홍보용 브로셔에 들어가기에 알맞은 정돈된 공간이다. 복잡한 것들은 사라지고 공간은 추상화되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사라져야 했던 ‘지저분한 것’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공간은 모든 시간을 응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라벌홀의 옥상에는 무수히 많은 희미한 흔적, 역사들이 있었다. 서라벌홀이 생긴 이래 학생들이 해온 사회 운동과 교육투쟁, 자치적 활동을 홍보하기 위한 수많은 ‘플래카드’들이 바로 옥상에서 쓰였다. 옥상 바닥에는 얇은 천에 배어 나온 지난 시기의 구호들이 겹겹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제 서라벌홀의 옥상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들어섰다. 그 밑에는 초록색 우레탄 바닥만이 남았다.

‘누구에게’ 효율적인 공간인가?

중앙대 캠퍼스 재편의 또 다른 키워드는 ‘효율화’다. 일만이천에서 일만오천이 된 의혈학우의 숫자가 말해주듯 캠퍼스 내에서 함께 생활하는 학생의 수가 증가했다. 이에 따라 학교는 강의 구조조정을 통해 기존 공간을 효율화했다. 당연히 효율성이 높은 공간에는 많은 인원이 집약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콩나물 강의실 문제는 바로 공간 효율화의 결과다. 교육여건에 비해 학생 정원이 많은 것은 ‘잠재적인 성장’과 ‘발전의 동력’으로 인식된다. 일단 정원을 늘리고 이에 맞는 교육공간을 창출하겠다는 무리한 시도가 교육권 문제의 본질이다. 본부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발전을 위한 고통을 학생에게 전가하고 있다.
세계 100대 경영대학으로 도약하기 위해 가칭 경영경제관이 착공되면 대운동장과 자이언트구장이 사라져야 한다. 최근 총학생회와 <중대신문> 보도 등을 통해 대운동장 공간을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적당한 대안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운동할 공간이 사라진다는 염려는 중의적이다. 학내의 정치적 의사결정과 실천을 위한 장소 역시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간의 효율적인 사용이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무엇’을 줄여나가겠다는 것이다.
중앙대에는 정문과 중문, 후문이 있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실제로 이용함으로써 만들어진 작은 문들이 있었다. 학생회관 뒤편의 쪽문이 있었고, 본관 측면에 아직 남아 있는 틈새문도 있다. 이런 문들은 흑석동 주변의 자취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샛길이었다. 학내에서의 동선도 그만큼 다양했던 셈이다. 그러나 흑석동의 뉴타운 개발과 맞물려 쪽문은 사라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내의 큰 길을 따라서만 움직이게 되었다. 학내의 동선도 효율화되고 끊임없이 합리화된다. 우리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제품들처럼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한다. 그리고 정해진 길의 길목에는 어김없이 카페와 페스트푸드점 같은 소비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캠퍼스 공간은 우리의 손금이다

공간은 그 공간을 이용하는 구성원들의 삶의 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모두가 똑같은 길을 걷고, 깔끔한 외관에 익숙해지는 동안 정치적 실천이나 소통방식도 변화한다. 우리는 은연중에 철저하게 구획되고 누구로부터도 침범당하지 않는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손으로 쓴 정치적 구호들은 더러운 것이라 여기고, 공모전 포스터와 기업홍보는 깔끔하고 실용적인 것이라 여기게 되진 않았을까?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다시 고민해보자. 우리의 공간은 강요된 질서로 꽉 짜인 구역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범위여야 한다.
2011년 정문앞 잔디밭에서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대해 토론하자며 열린 집회는 사실상 불허되었다. 재단과 본부를 비판하는 대자보는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거나 제거되어야만 했다. 2010년 구조조정 당시 학내 곳곳에 붙었던 ‘기초학문 수호’라는 플래카드는 학교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더러운 것들로 여겨졌다. 이런 것들이 사라진 공간은 깨끗하다. 그러나 갈등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소중한 조건이다. 조용하고 완벽히 정돈된 공간은 무기력한 공간이고 따라서 죽은 공간이다. 소음이 없는 광장, 발자국이 없는 잔디밭, 공연에 대한 사과를 해야만 하는 노천극장, 운동할 수 없는 대운동장, 마음놓고 쉴 수 없는 여학생 휴게실…….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떤 건강한 공동체도 상상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공원이 아니라 더 많은 광장이 있어야 한다. 비어 있어서 무엇으로든 다시 채울 수 있는 공간, 그것이 곧 광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간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새길 수 있는 공간(空間) 그 자체다. 거대한 스펙타클로 세워지는 건물을 보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그 건물 안에서 학생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야 한다. 그 공간을 얼마나 우리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캠퍼스 공간은 의혈의 손금이다. 타고난 손금은 운명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살아가며 각자의 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손금과 굳은살을 손에 새긴다. 그 공간이 어떻게 설계되었든 그 공간을 이용하고 점유하는 자의 세계관은 공간 전체의 의미를 뒤집어놓기도 한다. 홍익대학교의 본관, 까페 마리와 두리반, 그리고 85호 크레인에서 우리는 그 ‘전복’의 잠재력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현재의 실천과 기억을 캠퍼스 공간에 흔적으로 새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미래는 다가올 시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 캠퍼스 안 도처에 있다.

| 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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