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칼럼] 유령의 수사학, 구조조정이라는 마법

유령의 수사학, 구조조정이라는 마법

| 그르누이

봄은 지나가버렸다. 잊힌 사월과 스쳐간 오월의 햇살이 그토록 잔인한 이유는, 우리에게 그걸 충분히 향유할 시각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아서일까. 예컨대 지금 본관 앞 천막 안에선 그러한 권리를 여전히 박탈당한 한 무리가 점점 잔인해져만 가는 햇살을, 아니 그러니까 본부를, 어둠 속에서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결국 모두가 숨죽이며 머릿속 한켠에서 걱정/기대했던 대로 본부는 일사천리로 구조조정 절차를 밟아 나갔고, 그 잠정적 결과는 학과 통폐합과 해당 4개 전공의 폐지였다.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지나쳐 온 몇 달 동안, 본부는 그토록 열성적으로 그들에게서 봄을, 꿈을, 그리고 변화에 대한 기대 자체마저 빼앗아갔다.

특히 학생-교수-본부라는 관계를 교묘한 수사로 저울질하며 구조조정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주입시키는 본부 측에게, 공대위를 비롯한 연대 단위들은 그것의 ‘역사’를 들이밀며 눈앞의 현실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스스로가 아님을 천명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불어 이 문제가 당사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학우들의 삶과 긴밀하게 연계된 어떤 ‘사건’임을 선언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실상 이러한 성토가 얼마큼의 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동력으로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대응과 운동의 방법론을 들먹이기 전에, 무엇보다 현재 공대위와 비-공대위가 가진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해내는 것, 그 옅은 누빔점이 가진 가능한 조건들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해 보인다.

지난달 말 열린 공대위의 기자회견과 지난하게 진행된 총장과의 면담에서 정태영 공대위원장(비교민속학과 3학년)은 이러한 사태를 “공장에서 생산라인이 끊겨버린 것”으로 비유했다. 스스로의 전공을 공장이라고 비유할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은 차치하고라도, 그 무엇도 생산하지 못하는 박제된 기계와 이를 다루는 노동자라니. 상당히 저릿하게만 들린다. 분명 그건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고, 정확히 말해 ‘중앙대’라는 타자로부터 선언된 죽음에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지젝의 말을 차용하자면 구조조정을 계시받은 그들에겐, 좋든 싫든 죽지 않은not dead 삶이 아니라 안 죽은un-dead 기계적 삶이 유예되어 있을 뿐이다. 대신 여기서는 어떤 새로운 차원이 출몰한다. 구조조정과 비-구조조정(혹은 몇 발짝 물러서서 민주적/비민주적 구조조정) 사이엔 그들의 ‘잃어버린 선택지’이자 ‘산 죽음living-dead’이라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유령’이라는 작금의 존재양식이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유령, 하니 생각나는 것인데, 이는 바로 본부 측의 끈질긴 구조조정 의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투쟁에 투쟁을 거듭하고, 수많은 재학생과 미래의 신입생이 예고된 피해를 입어도 절대로 죽음에 이르지 않고 살아남는 마법으로 인해, 본교와 구조조정의 발전적인 미래는 눈이 멀도록 화창하게만 보인다.

이같은 본교 측의 수사마법의 잠금해제를 위해 또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 허먼 멜빌의 소설 주인공인 ‘바틀비’라는 녀석이다. 이 유령 같은 녀석은 당최 뭔가 하기를 싫어해서, 모든 명령과 억압에 대해 “나는 그러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I would prefer not to)”는 말만 되풀이한다. 다만 그의 말은 단순히 주어진 행위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거부/부정의 제스처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같은 부정성의 긍정이라는 측면은, 단순히 Y/N(혹은 효율/비효율, 인기/비인기 등)으로 양분되는 세계의 판단을 중지시킨다. 이는 우리가 본교 측의 억압적 수사에 대응하고 고요히 흘러가는 구조조정의 흐름에 제동을 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상 현재 공대위에게 필수적인 태도는 부정의 제스처를 멈추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공대위를 가장한 우리들 또한 공대위/본부라는 두 유령이 바라보는 모종의 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유령들과 우리의 시차(視差)는, 그들이 가진 정세들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위치로부터 계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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