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 짱큰콩

행사도 기념일도 참 많았던 오월이 지나갔다. 기억해야 할 날들이 너무 많았다.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부처님 오신날, 로즈데이ÿÿ. 사실 기념일이라는 것이 그런 거다. 우리가 굳이 어떤 특정한 날을 정해서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것. 시간이 흘러 흘러도 ‘우리 이날만은 기억하자’해서 만들어진 것. 글쎄,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의문이 든다. 요즘의 모든 기념일은 마치 ‘장미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 하고 스쳐 지나가는, 그저 그런 사소한 날로 변하는 듯 하다. 오히려 가볍게 선물 주고받는 00데이가 오래된 어떤 기념일보다 중요하게 ‘기념’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기억’은 이렇게 묻혀져 가는 것일까.

기념과 기억, 그 사이에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때때로 우리의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는 장치들이 있다. 최근 개봉한 <지슬>, <비념>과 같은 영화가 있고, 수많은 역사책이 있고, 관련 연구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 속으로 파묻히려하는 기억들을 자꾸 불러내야만 잊지 않을 수 있다. ‘역사’ 속에 들어간 순간, 기억은 순식간에, 누구도 차마 건들지 못하는 그대로의 “화석”이 되고 만다. 조금만 나와 떨어져 있어도 엄청나게 멀게 느껴진다. 무서운 사실은, 그러한 과거의 일들이, 내가 알든 모르든 현재에도 분명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간다.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들이 살아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더 크게 문제시되지 못하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강정마을을 비롯한 또 다른 희생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통령이 매년 방문하고, 묘비 앞에 찾아가는 것으로 광주 5.18의 모든 것은 끝난 것일까. 이제 놓아줘도 되는 ‘아름다운 역사’일까. 우리가 ‘아름답다’며 간직하고 있는 사이에 일베는 ‘민주화’ 그 자체에 반감을 가지며 ‘아름다운’ 기억의 지위를 다시 뜯어고치는 중이다. 기억이 단지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우리는 결국 모두 기억투쟁 속에 살아가며, 단지 그것을 모른 척 할 것이냐, 아니냐의 선택지만을 고를 뿐이다.

기억은 기억을 낳는다

기억투쟁이란, 기억이란, 책에 나오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까이에서도 늘 존재한다. 학생총회가 그렇고, 학내 구조조정이 그렇고, 대학의 의미가 그렇다. 과거에 활발했다지만, 이후 7년간 성사되지 못했던, 올해 다시 성사된 학생총회의 역사만 더듬어봐도 충분히 많은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학생총회는 그 자체로, 큰 의제 아래에서 한자리에 모인 일반 학우들에게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 된다. 평소에는 보기 힘들었던 타과생들을 직접 마주하며,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하면서 느끼는 동질감 또한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 지난 7년간, 몇 년간은 정족수 미달로 인해 총회가 번번이 성사되지 못하더니, 어느 해에는 아예 열리지도 않았다.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사된 경험의 부재는, 이미 학내에 짙게 깔린 정치적 혐오와 무관심 안에 잘 녹아 들어갔다. 그리고 올해, 다시 총회가 열렸고, 성사되었다. 우리 공통의 기억을 다시 한 번 세울 수 있음에 기뻤다. 다만 조금 걱정된다. 총회 이후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그 결과는 누구도 모르는 허탈한 이 상황 또한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잡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구조조정을 더듬어 보자. 2010년의 구조조정이 결국 오늘날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로 볼 때, 한 시점의 일이 단지 그 당시 피해학생들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무자비한 과정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를 것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폐과에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전과’만이 최고의 보상인양 말하는 학교의 태도도 그대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대면하게 된다. 과거 구조조정을 겪은 자들의 기억, 그 당시 대응한 자와 그렇지 않았던 자의 기억, 이후 지금의 구조조정을 겪는 자들의 기억, 또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 안의 기억. 이 모든 기억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다만, 이중 하나의 기억은 나의 것일 테고, 이 기억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구조조정에 직면했을 때 학생 스스로의 지위는 어떠하였는지, 그것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생각 속에서 자신의 지위는 어떠하였는지. 이는 결코 지금 우리 안의 기억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배운 역사라는 것이, 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기억 투쟁으로 쓰이고 고쳐지듯, 지금의 기억을 함께 나누는 우리의 기억은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된다.

‘낡은 것’을 현재로 불러내기

이전의 대학의 의미란 ‘낡은 것’이며 오로지 기업식의 대학을 추구한다는 이사장님의 교육철학 또한 그렇다. 과거 ‘낡은’ 가치들을 하루빨리 제거하고, 불합리한 구조에 종속되는 것을 합리화하며 더 많이 종속되라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더 이상 학교의 주인인 ‘학생’이 아니라, 건물을 이용하고 강의를 사는 ‘소비자’일 뿐이라고 스스로 규정짓게 한다. 학생이었던 과거를 묻어버리고 소비자로서의 새 삶을 살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자꾸만 잊힌다. 혹은 빼앗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의기억을 모른 척하고 묻으면 묻을수록,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 앞으로 나아갈 일 또한 묻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학교의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잃는 수업권, 선택권, 주인의식 등은 쌓여왔고 쌓여갈 것이다. 지금의 학교는 ‘비영리 기구’라는 본래의 지위를 잊고서 때로는 ‘싸구려 비자장사꾼’으로, 때로는 ‘유학 브로커’로 자유롭게 변신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경쟁력’있고 거대한 학교가 발전한 학교라는 것은, 일방향적 경제적 진보가 진보의 전부라 믿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과거를 현재에 불러내어 마주해야 한다. 역사를 역사에 가두지 않고 정치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던 발터 벤야민의 말이 떠오른다. 기념일이 달력 속에만 묻히지 않고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가 있듯, 지금-여기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역사적 상황들을 역사책에 박제시키지 않고 다시 불러내어 변화를 꾀하듯이, ‘우리가 맞닥뜨린 지금의 문제들이 어떻게 기억되어 왔고 어떻게 기억할 것이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단지 ‘기억’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꿈꾸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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