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치어 문화보다 무서운 구조조정 문화

치어 문화보다 무서운 구조조정 문화

| 김성윤 (사회학과 강사)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중대신문에서 자문을 요청하고자 전화가 왔습니다. 안성캠 예술대학에서 새내기 중심으로 취업을 위해 강압적 훈련을 시키는 것에 대해 취업문화와 관련해서 여쭤보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요.’ 내 연락처를 가르쳐줘도 되냐는 메시지였다. 그러더니 한 마디 덧붙였다. ‘근데 누가 그러는데, 저번에 학내에 어떤 선생님이 학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고 어떤 제재가 있었다고 하는데 살짝 걱정이 되네요.’ 친절하게도 내 신변까지 걱정해주는 것이었다.

취업문화? 치어문화?

그나저나, 다른 전공도 아니고 예술대에서! 다른 학년도 아니고 1학년을! 그것도 강제로 ‘취업’ 훈련을 시키다니! 내가 해줄 얘기가 있으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연락처를 알려주도록 하고 잠시 후 기자와 전화 통화를 나눴다. 그런데 웬걸. 예술대, 1학년, 강제, 훈련까지는 전해들은 이야기가 맞았지만, 그 내용은 취업이 아니라 ‘치어’(cheer)였다! 강압적 치어 훈련! 웃음이 빵 터진 나는 순간적으로 멘붕에 빠졌다. 아찔한(?) 오해 덕에 강제 취업 훈련에 대해 미리 짜놨던 이런저런 내러티브도 별 소용이 없게 됐다.

몇몇 독자들은 치어리딩 강제 훈련이 뭔 말인지 전혀 감이 안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10년이 조금 넘은 것 같은데, 안성캠퍼스에서는 봄철마다 학과 대항 체육대회의 일환으로 치어리딩 경연도 열리곤 했다. 그런데 그게 과열 양상을 띠기 시작하면서 캠퍼스 전체가 치어리딩으로 들썩이게 됐다. 대회 두 달 전부터 캠퍼스 곳곳에서는 과별로 음악을 틀어놓고 군무를 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연습에 매진해 자정을 넘기는 날도 더러 있다. ‘동작이 맞지 않잖아!’ ‘좀 더 분발해야 한다고!’ 불호령은 다반사. 간혹 연습시간을 맞추지 못한 후배들한테는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예전 일이기는 하지만 얼차려도 있었다고 한다.

외부자들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생소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자생적이고도 집합적인 대학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정체모를 전통에 대한 집착이 캠퍼스 전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나 역시도 치어리딩 열풍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같은 양가적 감정에서 오락가락이다. 어떻게 해서 대동놀이도 아니고 하필 치어리딩이 학생들을 결속시킨 매개물이 된 것일까. 복잡한 감정과 풀리지 않는 의문이 똬리를 튼다.

어쨌든 새내기들을 동원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요즘 같은 세태에 ‘하나 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긴 하지만, 거기에 ‘강압’이라는 요소가 있다면 캠퍼스 안팎에서든 학과 안팎에서든 논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나가 되기 위해 강제 동원을 하고 거기서 ‘우리’라는 범주를 내세워 다른 목소리들을 억제하는 성향들은 공동체가 개인을 억압할 수도 있다는 다분히 고전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게끔 한다. 이번에 ‘중앙인’ 커뮤니티 등에서 문제제기가 있었던 배경에도 그러한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쉬운 냉소, 능사가 아니다

그렇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들에 단순히 조소나 냉소를 보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대학생들이 어떤 식으로든 유대와 결속을 통해 공통의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파편화된 줄 알았던 대학생들이 알고 보니 다른 누구보다도 하나가 되려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에 반해 강압이 아닌 이상 어떠한 공동체적 결속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늘날 대학문화가 처한 특정한 한계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음주문화가 가진 폭력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술 없이는 그 누구도 초자아의 ‘뚜껑’을 연 채 진솔한 집합적 관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으름장과 얼차려가 나쁜 건 알지만 그것 없이는 하나 되는 경험을 누리기 어렵다는 것, 등등. 불행히도 우리 중 그 누구도 강압이 아닌 다른 효과적인 동원 방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치어리딩 문화, 굳이 치어리딩이 아니라도 전체주의에 준하는 어떤 현상들이 있을 때 하나의 스캔들쯤으로 여기고 이와 같은 ‘공동체주의의 유령’을 규범적으로 단속하면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수용 태도는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문제를 초래한다. 하나는 말했던 대로 사회적 결속을 향한 열망들을 경시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치어리딩 문화 등등을 대상화하면서 정작 우리들 자신이 속한 문화적 성향에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대신문>과 다리를 놨던 지인의 오해에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그는 왜 ‘치어 문화’를 ‘취업 문화’로 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안성캠퍼스의 치어 문화만큼이나 캠퍼스 전체의 취업 문화도 문제적이라는 잠재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는 최근 들어 학문단위 구조조정이라는 대학 사회의 또 다른 ‘강압’ 문화와 만나고 있다. 그런데도 학내 구성원들은 치어리딩의 강압에 비해 구조조정의 강압에 대해서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듯하다. 왜 그런 걸까.

강압에 대한 민감함, 그 간극

취업을 비롯한 기타 실적이 저조한 학과들은 조직 자체를 축소해버리고 상대적으로 고시교육이나 취업교육에 관한 예산을 늘리는 추세는 중앙대가 이미 ‘취업’ 중심 대학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교수, 직원, 학생을 막론하고 취업과 대학발전을 등치시키는 게 이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이 돼버렸다. 1990년대 초중반 대학자율화 논의가 한창일 때, 우리 학교가 취업 중심 대학이 아니라 연구 중심 대학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에 비하자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구조조정에서 학문전략이라는 게 운위된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치어 문화의 강압성보다 취업 중심 구조조정의 강압성은 더 무서운 문제일 수 있다. 민감한 문제제기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보자면 치어 문화보다도 훨씬 더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리적 형태의 폭력만 아니라면, 적절한 보상만 있다면 그 어떤 강압도 괜찮다는 듯한 모양새다. 그렇다면 진짜로 위험에 처한 건 치어리딩 문화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아닐까. … 치어리딩 때문에 시작한 의문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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