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 천막을 읽고 나는 쓰네

천막을 읽고 나는 쓰네

| 버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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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은 외로웠다. 본관에 일이 있거나, 구태여 좌우를 둘러보며 걷는 사람이 아니면 천막의 존재를 체감하기 힘들었다. 천막의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들도 다만 ‘의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못 본 척 지나가거나, 바라보면서 지나가거나. 그나마 나은 경우에는 일부러 길을 돌아 천막 앞을 지나가면서 세 걸음에 한 번씩 힐끔 쳐다보고 가는 게 고작이었다. 본부에게 천막은 옷으로 가려지는 어디쯤에 작게 돋은 여드름 같을 것이다. 짜면 좋고, 안 짜도 굳이 상관은 없는, 그런 여드름. 천막이 불편한 무엇이 되지 못하는 까닭을 본부는 안다. “학칙개정 공고가 난 이후엔 구조조정 안에 대한 수정이 거의 불가능”(인문사회계열 윤형원 팀장)하기 때문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천막을 치는 순간에도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대위는 무력하게 굴복하는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 지루했던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공대위는 분주해진다. 1교시 수업을 듣는 학우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줘야 한다. 아침 아홉시, 정오, 저녁 여섯시가 대목이다. 유인물에는 “학교의 주인은 꿈을 찾아온 학생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대부분의 학우들이 거리낌 없이 건네받지만 열심히 읽는 것 같지는 않다. 받자마자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거나, 제목 정도를 읽고 시선을 피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아예 유인물을 받지 않는 학우들도 더러 있다. 그래도 공대위는 웃는다. 유인물 배포를 멈추지 않는다.

‘즐겁게 하자’

‘웃으면서 하자. 질 때 지더라도 지치지는 말자. 즐겁게 하자.’ 공대위의 암묵적인 원칙이었다. 천막농성 첫날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자축(?) 파티를 연 것도 그런 이유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학교 덕분에 이루게 됐다’는 공대위원장의 농담도 그런 이유다. 천막 위치가 앞으로 본관이라는 산을 두고 뒤로는 청룡호수를 등진, 이른바 ‘배산임수’의 지형이라는 농담도 그런 이유다. 부당한 일에 대한 학우들의 무관심에도 공대위는 의지로 낙관하며 지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천막은 둘로 나뉘어있다. 여학생 천막을 따로 마련한 것이다. 천막 좌우로 ‘천막농성 0일째’라고 적혀있다. 그중 큰 천막 내부로 들어서면 ‘천막 안에서 지켜야 할 우리들의 약속’이라는 내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천막에 방문하는 모든 분들께 반갑게 인사하기, 기상시간·회의시간 잘 지키기, 음주금지, 흡연금지, 도박금지, 연애금지, 천막 내 정리정돈·분리수거 습관적으로 하기, 담당업무 잘 하기, 과도한 소음 내지 않기, 천막 사수하기. ‘천막 사수하기’에는 빨간색 별 세 개와 ‘꼭!’이라는 강조가 함께 쓰여 있다. 내규 옆으로는 모기향이 피워져있고,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정기적인 회의는 월요일과 수요일 저녁 여덟시다. 하지만 필요한 경우면 언제든 회의를 한다. 본부의 새로운 결정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 나갈 것인지. 회의 주제는 매번 다르지만 전제는 언제나 같다. ‘학우들의 지지를 얻는 방향으로.’ 별것 아닌 행동에도 공대위는 예상되는 효과와 반응을 세심하게 고려한다. 회의는 마냥 심각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그 중간쯤 분위기로 자유롭게 진행된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있지만 최소한의 진행을 맡을 뿐이다. 아무도 주도하지 않는다. 모두가 합의할 때 비로소 회의가 끝난다.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 인생도 시리고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은 있지만 /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한 채 / 쌩쌩 달리는 차 소릴 들으며 잠을 자는지 / 내가 왜 세상에 버림받은 채 /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공대위 학우 한 명이 노래를 들려줬다. 꽃다지의 ‘내가 왜’라는 노래다. 요즘 가장 공감 가는 노래라고 한다. 출근 시간이면 천막 앞으로 차량이 많이 지나간다. 본관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주차장이 있어, 출근 차량은 중문으로 들어와 본관 앞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천막 안에 앉아있으면 차량이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이 그렇게 매섭단다. 연대 단위들이 함께 도와주지만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단다. 낮엔 한여름 날씨지만 밤은 아직도 쌀쌀하다.

월요일(6월 3일) 회의를 한 시간 앞두고 ‘중앙인’에 공지사항이 올라왔다. ‘농성천막 철거 요청’이라는 제목이었다. “학문단위 재조정을 반대하는 학생들에 의하여 서울캠퍼스 본관 앞 도로에 천막을 설치하고 농성”하는 것이 “학교의 학칙에 위배되는 사항”이므로 “학생들의 안전과 캠퍼스 미관을 저해하는 농성중인 천막과 현수막을 조속하게 자진하여 철거”하라는 것이다. 공대위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왜 굳이 커뮤니티로 요청하는지 이해를 못할 뿐이었다. 본관 바로 앞에 천막이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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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을 철거할 수 없는 이유

농성 여섯째 날, 화요일에는(6월 4일) 김호섭 인문사회계열 부총장이 천막에 들렀다. 부총장은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구조조정은 이미 결정된 것이므로 백지화는 있을 수 없다, 후속대책 논의하자, 너희가 다치는 것 보고 싶지 않다. 새로운 얘기가 하나 있었다. ‘너희가 하는 일들이 학칙에 위배돼 본부에서 징계 논의가 진행 중이다.’ 마침내 등장한 징계 위협에도 공대위는 그리 술렁이지 않았다. 누구를 징계하겠냐는 물음에 ‘주도하고 선동한 사람을 조사해서 징계하겠다’는 부총장의 답변이 잠시 황당했을 뿐이다. 부당한 것은 징계위협이었다. 그들의 농성이 아니었다. 부총장은 주말이 지나면 강제 철거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남겼다.

공대위가 승리를 확신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질 거라는 비관에 차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공대위는 어쩌면 이후의 구조조정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무력하게 패배하면 내년의, 내후년의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더욱 무력할 수밖에 없다. 공대위가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밤이 깊었다. 본관의 셔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천막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공대위는 회의를 이어갔다. 내일 아침부터는 리플렛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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