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을 읽고] 잠항중지 : 토끼의 탈을 벗을 때

| 천용성

규정이나 정의는 일을 편하게 한다.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존재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5번째 공준이다. 실제야 어쨌든 정리 위에서만 확장 가능한 종류의 사고들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다. 특히 나나 내가 속한 현실에 대한 규정들이 그렇다. 나는 누구다. 우리는 누구다. 우리는 오늘 날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 입밖으로 내는 순간 말에 속박된다. 많은 것들이 편해지지만 동시에 하기 어려운 것들이 생겨난다. B.C 300년 유클리드가 말한 5번째 공준이 부정되기까지는 약 2000년이 걸렸다.

잠망경의 편집진은 스스로를 잠수함 토끼에 비유했다. 좋은 표현이다. 단단하면서도 감성을 자극한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적절치 못한 은유다. “수병들은 토끼를 보고 산소를 보충하기 위해 잠수함을 다시 수면으로 띄운다.” 창간호 여는 글의 한 문장이다. 이들이 되고자 한 토끼는 사실 살아있는 ‘산소농도측정기’일 뿐이다. 괜찮은 바로미터가 없는 사회에서 이들의 역할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제조건이 있다. 계측기의 눈금을 읽고 잠수함을 부상시킬 수병이 있어야 한다. 행동할 사람이 없으면 배는 가라 앉고 토끼도 죽는다. 하지만 우리에겐 충성스런 수병이 없다. 주어진 역할보다 배우의 수가 적은 상황에서 이들은 “잠수함의 토끼를 자처”했다. 굳이 돌려말할 필요가 있을까. “난 수병은 하지 않겠다”라는 말이다.

잠망경도 그렇다. 작명의 전후관계를 추정하자면 이렇다. 스스로를 ‘잠수함 토끼’라 칭했으니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괜찮은 이름들을 생각했을 것이고, 개중에 괜찮은 것에 괜찮은 설명을 붙였을 것이다. “잠수함의 안전한 운항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잠수함을 둘러싼 관계들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말은 좋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지상탐사를 위해 잠항 중인 배를 생각해보라.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숨으려면 잠망경을 내려야 하고, 탐사를 하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해야 한다. 필명을 쓴다고 누군지 모를까. 적은 최첨단 대잠소나를 장착한 구축함이다. 탐사활동을 보고도 가만히 두는 것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태계 관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함일 뿐이다.

잠수함 토끼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의 동력원을. 디젤도 아니고 원자력도 아니고 인력이라는 것을. 사명감이나, 자부심이나, 저항심이나, 그에 준하는 어떤 마음이라는 것을. 그런 마음을 모두 다 쏟아 넣은 친구들은 어느 날 잠수함 밖으로 떠날 것이다. 먼저 간 수병들처럼 조류에 몸을 맡기고. 가까스로 구출된 그들은 페이스북 잠망경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르면서 전생처럼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파고와 너울은 잠잠해지지 않을 것이다. 격랑은 자기들의 유일한 창구인 거울을 부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당신들이 아직까지 온전하게 살아 남은 것은 위협의 냄새를 맡는 코가 발달해서가 아니라, 위험을 견디는 의지가 굳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토끼의 탈을 벗어야 할 때다. 오늘의 활동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기위안에 그쳐서는 안 된다. 끝은 정해져 있고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탐사가 아니라 공격이다. 어뢰를 장전하고 발사 버튼 위에 손을 얹어라. 잠망경은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전보’가 아니라 이겼음을 알리는 ‘승전보’가 되어야 한다. 조금 더 과격해지고 조금 더 선동적이어도 좋다. 알겠지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면 하는 것이 옳다. 후회는 언제나 남는다. 여한이 없는 쪽이 좋다. 그리고 끝 뒤에 더 큰 세상이 있다.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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