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새내기 여러분은 안녕들 하십니까?

| 주현우

지난해 12월 10일,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로 출발한 이래 ‘평범한 혹은 평범하지 않은 물음’에 대하여 한 달 동안 약 천여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대자보로 답했습니다. 철도 파업에서 학업과 취업, 밀양의 송전탑까지 주제뿐만 아니라 답하는 사람들 역시 대학생만이 아닌 고등학생과 성소수자, 직장인 등 다채로웠던 흐름 속에서 첫 자보의 작성자로 글을 기고하게 돼 개인적으로 어깨가 무겁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이 글을 통해 제가 전해드리고자 하는 ‘말’이 무거워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호는 새내기 특별호라 들었습니다. 새내기,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이 단어의 주인공들은 아마도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한 두 차례 고배를 마시고 대학문턱을 넘은 전직 수험생들일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쯤 ‘안녕하지 못한’ 수험생활을 청산하고 앞으로 지낼 새로운 공간의 생활에 한껏 들떠 있을 터, 미리 초를 치는 것이 예는 아닐 듯싶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러분들이 다닐 대학은, 아니 한국의 대학들은 결코 안녕하지 못합니다.

안녕하지 못한 중앙대

지난 2월 10일, 성균관대 비천당 앞에서는 대학의 안녕을 묻는 대학생들의 대자보 백일장이 열렸습니다. 약 30여 명의 학생들은 그림과 글로 ‘대학 위기와 연대’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뽑힌 장원은 다름 아닌 이 글이 실릴 ‘잠망경’의 공간, 중앙대의 학생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학교는 청소노동자분들이 학교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파업을 했고 어제까지 과실 옆의 이웃 학과가 없어지고, 그 과의 친구는 꿈도 후배도 잃었습니다. 아니, 빼앗겼습니다.” 이처럼 북받치는 울분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긴 시간동안 입시라는 굴레 아래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달려온 분들이기에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여러분이 입학한 중앙대에서 일어난 일이며 현재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학생과 노동자들의 대자보를 그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만으로 철거한 곳이 바로 중앙대입니다. 그렇다면 중앙대 한 곳만 이런 상황일까요? 역설적으로 기뻐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의 안녕하지 못한 공간 속에서

서울 내 대학 중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습니다. 당장 제가 대자보를 써 붙였던 고려대 역시 현재 청소노동자의 비인간적 처우와 간접고용으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학과 통폐합 및 불합리한 학칙개정으로 학내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동국대에서는 사학연금으로 28억을 등록금으로부터 지출했고 이화여대와 홍익대는 등록금 적립금 증가액으로 누가 더 많이 쌓아두나 경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방으로 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원광대에서는 총장이 직접 방송국장을 임명하기까지 합니다.

이쯤 되면 오히려 문제없는 곳을 찾는 것이 더 쉬울지 모르겠단 생각도 듭니다만 그 역시 요원합니다. 막상 입시에서 살아남아 대학에 들어와 보니 한 학기 수백만 원의 등록금과 상대평가 속 살벌한 스펙 경쟁, 무엇보다 개선되지 않는 임금 및 실업률 앞에서 단지 ‘입시’라는 단어가 ‘취시’로 바뀐 것 이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도 평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안녕하다”고 자기합리화하거나 “안녕하지 못하지만 바꿀 수 없다”이거나 말입니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이 되었든 우리 탓은 아닙니다.

별 탈 없다는 외면

스스로를 “안녕하다”고 합리화 하는 것은 일찍이 우리가 입시과정을 통해 배워왔던 생존법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란 말도 있지요. 문제는 1등이 아닌 한 모두가 마찬가지로 루저일 뿐인 경쟁사회에서 그런 합리화가 언제까지 나를 붙들어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바뀔 만큼 사회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바꾸기 위한 한 걸음, 또는 그런 한 걸음이 필요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해보입니다.

더불어 위험을 피하는 것은 동물의 본성입니다. 정확하게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비정치적이어야 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또한 주어진 질서에 순응해야 하고 힘들더라도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하는 것이 현시대 삶의 숙명이요, 운명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왔고 ‘아직’까진 별 탈 없이 잘 살아왔을지 모릅니다. 사실 제 자보의 출발은 여기서부터입니다. ‘만일’ 별 탈이 있다면, 또는 별 탈이 있을 것 같다면 ‘안녕하지 못할 것’이고 그럴 경우 ‘안녕하지 못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의 봄

앞서 대자보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은 중앙대 학생은 말미에 이런 말을 적었습니다. “봄인 줄 알았던 대학은 겨울이었습니다. 너무 춥습니다. 너무 추워 타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 체온으로 연명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봄은 오는 것입니다. 꽃은 필 것입니다.” 결국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손을 잡고, 서로의 체온으로 의지하며,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그러나 안녕하지 못한 현실을 바꿔가는 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들 스스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자기정치입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운동의 핵심은 결국 나의 어려움을 구원해줄 타인이 아닌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실천과 말하기였습니다. 아기 코끼리 우화를 아십니까? 아주 어린 새끼 코끼리의 발목을 족쇄로 묶어 두면 처음에는 나가려 발버둥을 쳐도 힘이 없어 자포자기 하다가 결국 커서도 그 족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이런 족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의 족쇄, 행동의 족쇄, 망설임의 족쇄 말입니다. 하지만 끝끝내 봄이 오고 꽃이 피듯이, 내가 아닌 우리가 된다면 이미 족쇄는 없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여쭙고 싶습니다. 새내기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그리고 우리 안녕하도록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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