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대학의 위기를 넘어 대학사회 복원하기

| 버드나무

* 작년 8월 16일 고려대 생활도서관에서 <시간강사, 대학사회를 말하다!>라는 타이틀로 릴레이강연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에 자유인문캠프 기획단도 패널로 참석해 ‘대학의 위기와 학생운동의 위기’를 주제로 발제했습니다. 발제 내용이 새내기 학우에게도 유의미한 내용인 것 같아 글 말미를 조금 추가해 여기에 소개합니다.

대학이 위기라고 합니다. 기초학문은 천대받다 못해 아예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경영학-경제학이 가장 ‘인기 있는’ 학문으로 군림합니다. 학생운동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학생들은 학생 자치를 자발적으로 헌납했고, 대학언론은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그저 스펙 한 줄 쌓기 위해 동분서주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주인이 된 기업은 구시대의 대학 모델은 죽었으며, 앞으로 대학은 기업처럼 운영돼야만 한다는 ‘경영철학’을 공공연히 내세웁니다.

대학의 위기는 엄밀히 말하면 대학 ‘사회’의 위기입니다. 대학사회가 붕괴된 캠퍼스에는 기업이 들어와 활보하죠. 법인/본부는 “학생회나 자유게시판을 통해 곧잘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주장”하는 학생들에게, “대학의 의사결정권은 학교법인에서 비롯되고, 운영 주체는 학교법인의 이사회”라고 당당히 선포합니다. “학생은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므로 “지나치게 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대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훈계가 뒤따르고요. 중앙대학교 박용성 이사장의 말입니다.

와해된 대학사회, 파편화된 구성원

기업 재단의 ‘승리 선언’에 대해 대학사회는 감히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저항하지 못합니다. 대학사회는 이미 와해되고 구성원들은 파편화됐기 때문입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저항의 목소리들은 한데 모이지 않아 유효한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재단/본부는 저항 수단을 강탈하거나 혹은 저항하는 학생을 징계로 손쉽게 잠재웁니다. 2010년 중앙대의 기업화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단/본부는 비판적 교지 <중앙문화>를 전량 강제수거하고 예산을 끊었으며, 구조조정에 강하게 저항한 학생들을 퇴학과 무기정학 등으로 중징계했습니다. 중앙대 학생사회는 이후 빠르게 붕괴했습니다. 공론장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재단/본부는 저항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야금야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때 코믹 웹툰에서 ‘학교의 주인은 이사장인 저예요’라는 대사가 쓰였을 때 그것은 개그 요소였지만, 이제는 중앙일간지에서 ‘시평’의 이름을 달고 우리와 마주합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언뜻 당연해 보였던 말은 이제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의문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이제 주권을 되찾아 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더 많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 주권’에 매달릴 뿐입니다. ‘우리는 등록금을 냈으므로 당신들의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다.’ 학생들은 자치 침해에는 이제 분노하지 않지만, 서비스 받을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는 불같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학생들이 가장 분노하는 때는 수강신청에 실패했을 때입니다.

대학의 바깥은 없다

대학에는 더 이상 연대나 공동체를 이룰 공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빼앗긴 캠퍼스를 떠나 바깥으로 떠돕니다. 여러 가지 지향 아래 소규모 연구공동체를 이뤄 끼리끼리 공부하거나, ‘대외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몸 붙일 곳을 찾아 헤맵니다. 연대는 오직 대학의 바깥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로의 도피는 한순간의 안락을 선물할 뿐 장기적으로 같은 결과에 다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바깥의 저 다양한 공동체들이 자본의 압박(임대료)으로 말 그대로 ‘유목민’이 되어버렸음을 너무 자주 지켜봤습니다.

대학사회의 붕괴를 단순히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로 이해하고 묵묵히 버텨낼 수만은 없습니다. 대학은 여전히 중요한 공간입니다.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지금 대학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공간인지도 모릅니다. 대학은 처음부터 하나의 사회적 공동체로 출발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대학사회가 붕괴한 지금의 대학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반전’을 꾀해야 합니다. 다시 캠퍼스를 되찾아 그곳에 사회를 복원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싸울 수 있는 진지

기업이 잠식한 캠퍼스를 되찾는 일은 캠퍼스 안에 튼튼한 진지를 구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진지를 구축함으로써 스스로의 주인됨, 즉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진지전’이죠. 그렇다면 어떤 형태를 진지를 구성해야 할까요?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속한 ‘장소’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상 우리는 어디서든,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시작하는 것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유지와 지속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외부와 완전히 고립돼 존재하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지를 구축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공동체, 타자 그리고 외부와의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외부에 대한 의존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공동체의 목표도 ‘자족’일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범위를 넓히지 않고서는 지속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만의 공동체’를 추구하다 보면 그 공간과 범위가 점차 협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확장성과 운동성’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것을 배제할 때 한 공동체의 존재는 ‘해프닝(happening)’에 그치게 됩니다.

다시 ‘장소’의 문제로 돌아가 보죠. 대학이라는 단일한 공간 안에서도 학생회냐, 동아리냐에 따라 많은 조건들이 달라집니다. 공간이 달라지면 범위가 달라집니다. 범위의 차원에서 공동체의 중심적인 지향과 가치를 세우는 과정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공동체의 중심적인 지향과 가치에 따라 활동의 형태가 구분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진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공동체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제각각이므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무엇이 정답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약팔이’겠죠.

지금-여기의 공동체

이제 대학에 들어와 각자의 공동체에서 살아갈 새내기들에게 공동체를 어떻게 구축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지점입니다. 각자가 상상해온 대학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각자가 꿈꿔온 활동들이 있을 겁니다. 그 활동이 운동(movement)이든 아니든, 공동체를 필요로 하든 하지 않든,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학은 다양한 활동을 보장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영경제관’ 신축을 위해 학생회관을 허무는 것이 단적으로 이를 증명합니다. 동아리 활동 등 각종 학생자치 활동은 위축되고 날로 까다로워지는 졸업요건은 학교가 정해놓은 길을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꿈꿔온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여기에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대학의 높은 둑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학생자치를 억누르는 일체의 것들을 물리치는 게 우선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자유로이 어떤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겠죠.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요. 나중으로 미뤄온 역사는 결국 미래에도 반복되기 마련이고, 여러분은 발 딛은 ‘여기’를 언젠가 지나칠 수밖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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