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연애가 고픈 네게 건투를 빈다

| 설미

행복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을 통상 사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누군가에 따르면 연애는 행복보다는 불행에 익숙하기 위함이다. 매순간이 불안하고 사랑해서 행복해 죽을 것 같은 날은 멸종 직전이다. 연애를 했는데 세상이 핑크빛 말고 빡침의 연속에 있다면 이제 빡침에서 벗어나 진단을 해보자.

연애는 왜 하게 되나? 외로워서? 좋아해서? 사랑에 빠져서? 나에게 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건 개소리였다. 조금이라도 썸이 있으면 그 사람을 자기 전에 머리 속에 세워놓고 재단했다. 이렇게 사람들을 평가하는 데 기준이 된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란 적당히 ‘남성’스러우면서도 자상하고 또 나를 조금은 이끌어주는 사람이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했지만 연애에 있어 ‘여성’으로 규정 짓는 것도 익숙했다.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서 ‘여자가 적당히 내숭도 피워야지’, ‘스스로 다 할 수 있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라는 중압감은 이성애를 하고 있던 나에게 부담이 됐다. 이 부담은 나에게 자신의 매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규범에 맞춰야 한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여성다움에 대한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사랑과 연애관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대학에 들어와 남성과 여성에게 ‘사귀어라’라는 말과 러브샷을 쏘아대기 바빴다. 그리고 일부 열린 척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남성과 남성의 러브샷은 ‘게이샷’으로 여성과 여성의 러브샷은 ‘레즈샷’으로 불렀다. 특정한 사랑에만 이름 붙이는 그 행위가 너무나 불편했다. 나는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지만 여성을 좋아하는 대학교에 온 이후 나를 내 안에서 지워버렸다.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남들과 똑같은 사랑’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를 인정하고 나니 특정한 사랑을 ‘다른’ 사랑으로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다른’ 사랑으로 불리는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자와 같은 다양한 섹슈얼리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로 했다.

물론 스스로의 결심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했던 이유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왜 행복하지 않은 건지 스스로 물었다. 헤어져서? 아니면 쌍욕하고 헤어져서?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지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는 그 순간은 바로 ‘연애하지 않는 상태’였다.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남자친구 왜 안 사귀어?” 이 질문이 모든 생각을 대변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묻는 질문에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 괜히 이상해 항상 누군가를 좋아하는 상태로 남았다. 사회에서 연애하는 사람들이 중심인 것은 다들 알고 있다. 연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보는 타인의 눈은 항상 ‘저 사람은 어디가 모자른가’에 맞춰져 있고 연애하는 사람들에겐 ‘부럽다’를 연발한다. 세상은 연애에 대한 갈망으로 넘쳐나고 나도 연애만 하면 행복하겠지 생각했고 애인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는 연애에 대한 집착도 버리려 한다.

우리는 왜 연애를 일종의 가십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을까? 지금까지 고정관념처럼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 같이 뻔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아직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내가 버리려 결심했던 것들 것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고정관념이 또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앞으로도 연애를 단지 가십으로 취급하기보다는 연애에 대해 고민하고 나를 인정하려 한다. 당신이 만들어 갈 당신의 연애에도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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