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에게 말 걸기] 5월 멘붕설

| 짱큰콩 

2010년. 한창 수능공부에 열의를 올리기 시작한 때였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려다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인기 검색순위를 훑어보았다. 순위에 ‘중앙대’가 떠있었다. ‘오!’ 얼른 클릭했다. 책상에 ‘중앙대 신방과!’를 붙이고 한창 공부를 하던 시기였기에, 그 준거집단에 대한 애착은 아마 엄청났으리라. ‘어떤 일로 나의 대학이 검색 순위에 올랐을까?’ 설레며 들어간 인터넷 기사에는, 삭발식을 하는 학생들의 사진이 있었고, 구조조정, 타워크레인과 한강대교 시위 등 ‘나의 대학’과 전혀 어울리지 말아야 할 단어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그날 밤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토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대학에 과민 반응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날 일기장에 ‘중대 신방과’를 가겠다고 다짐하던 글을 썼다가 바로 뒷장에 그날의 신문 기사를 옮기며,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앞으로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정하는 건 참 막막했다.

대학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당시, 나에게 대학이란 막연한 애교심을 퍼부었을 정도로 내 꿈의 출발점처럼 여겨졌던 장소였다. 대학, 누군가에게는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일 수도 있겠고, 최초의 사회적 스펙을 따는 곳일 수도 있겠다. 혹은 여러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자신의 바람대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서 엄청난 승리감을 맛보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한 패배감에 씁쓸해하고 좌절하기도 할 것이다. 대학은 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우리가 순간순간 느낀 욕구들을 참아가면서 버틴 몇 년간의 시간이 담겨있어서일까. 치열한 경쟁 속에 누군가는 친한 친구들을 버려가며, 누군가는 가족과의 다툼도 벌여가며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망과 노력의 결정체가 ‘대학 입학’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이제 말 그대로 ‘큰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나의 학창시절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엄청난 이름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그 이름표를 끈질기게 부여잡고서 좀처럼 놓지 못한다. ‘대학이 곧바로 스무 살의 나인 것을!’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의 그 승리감과 패배감이 결코 개인적인 만족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입학 전, 지원 대학을 고르는 기준으로 삼던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는 입학 후 우리의 위치가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몇 등급 나왔니?” “어느 대학가니? 캠퍼스는 어디?” “무슨 과?” “수시? 정시? 무슨 전형으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우리가 흔히 받는 질문들이고, 하는 질문들이다. 설날에 어른들로부터도 많이 받은 질문일 테고, 새터 버스 안에서 서로 주고 받기 가장 쉬운 공통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졸업 전, ‘매일 그렇게 놀더니 지방 듣보잡대를 가는’ 반 친구를 보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고 ‘도대체 쟤가 어떻게…’라는 질투를 유발하며 일명 일류 대학을 가는 친구들에게는 패배감을 느끼기도 한다. ‘지방 캠퍼스 주제에’ 좋은 대학 간판을 달고 가는 친구를 보면 괜한 비웃음을 날리기도 하고,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같은 대학 타 캠퍼스 간 비난 글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거나 혹은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입학 후, 동기들을 만날 때면 ‘쉬운 전형’으로 들어온 듯한 친구를 보며 짜증을 느끼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다른 좋은 대학’을 붙었는데도 나와 같은 대학을 다니는 친구를 보면 순간적인 경외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 없이 타인과 나를 줄 세우고 구별 지으며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미 고등학교의 등급제에 익숙해진 우리는 너와 나 사이에 규정된 서열 매김 없이 살아가기가 어려워졌다. 학벌을 획득하고 뒤따르는 타인과의 차별화 욕구가 강남 중심주의, 인맥과시에서 존재하는 우열의 관계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구별짓기 속에서 우리는 ‘주체’로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학기 초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제 별로 재밌는 주제가 못 된다. 간혹 궁극의 훌리건들이 있긴 하지만, 보통 그런 학벌 나누기는 일단 한 캠퍼스에서 살게 된 이상 이야깃거리나 자부심으로서의 메리트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입학 초 충만하던 승리감은 잊힌 지 오래다. 스무 살의 나를 설명해 줄 유일한 한 가지는 그 역할을 잃었고, 그렇다면 이제 무얼 할 것인가. ‘중간대 중간대’라 불리는 이곳에서 다른 학교 학생보다 나은 스펙이라도 쌓겠다는 욕망이 생길 즈음의 시기이기도 하다. 멘붕이 찾아올 것이다. 헤매 보지만 딱히 답은 없다. 일단, 논다. 그렇게도 마음껏 놀고 싶었으니 음주가무로 4월 한 달이 쭉쭉 잘 갈 것이다. 곧 5월을 맞이하고 첫 시험도 치르게 될 것이다. 축제가 있긴 하다. 글쎄, 축제 기간 동안 캠퍼스 내 음주는 허한다고 하지만 축제 시즌은 생각보다 아주 짧더라. 그러면 그 다음은?

혹시 새내기 여러분이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대학가에는 <5월 멘붕설>이라는 게 있다. 검색창에 쳐봐라. 안 나올 거다. 대학이란 곳에 쬐끔 먼저 들어온 짱큰콩이 세운 아주 사적인 진리다. “3월의 설렘은 4월의 숙취로 이어져 5월의 멘붕으로 막을 내린다.” 학벌 경쟁이 재미없어질 무렵, 같은 대학의 같은 과 동기들 사이에서는 차별화 욕구와 마음속 조급함으로 생기는 신종 경쟁이 자리잡게 된다. ‘저 친구는 시 연합 동아리를 한다더라.’ ‘저 친구는 공연 스텝을 뛴다더라.’ ‘저 친구는 어떤 공모전에 나간다더라.’ 슬프게도 그 속에는 자신의 개인적 만족 뿐 아니라 그것을 하는 이나, 바라보는 이 사이의 우열 다툼이 또 다시 생기게 된다. 남보다 그럴싸한 활동을 하고, 남보다 비전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나와 같은 과 사람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다른 학교들과 차별화하기 바쁘지만, 같은 과 안에서는 동기들 간 보이지 않는 능력 경쟁을 하게 되고 그 속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며 스스로를 위치 짓고 싶어한다.

그러나 못 이기는 척, 혹은 확신 없이 시작한 스펙 쌓기에는 때때로 부작용이 따른다. 다른 대학을 다니던 한 친구는 뭔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딱히 하고싶은 것이 없었던 찰나, 선배의 권유를 받아 같이 환경 공모전을 준비했다. 그렇지만 그 취지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곧 회의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져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어떻게든 활동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중앙대를 다니는 한 친구는 좋고 유명한 행사라는 홍보를 믿고 열심히 학과 행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방학을 몽땅 바치며 준비한 그 일이 끝난 뒤, 글쎄, 어딘가에 내내 묶여있었다는 생각 뿐 딱히 자신에게 크게 남은 것이 있나 모르겠다며 허탈해하기도 했다. 제2차 멘붕 시기가 연달아 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남들과 다를 수 있는 첫 번째 이름표는 ‘대학’이었다. 그리고 입학 후 한때 우리는 그것들을 꽤 즐긴다. 승리감은 늘 너무나 쉽게 패배감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그 시기가 지난다 해도,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이름표를 달 때마다 남들의 이름표를 살피기 시작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무의식의 발로인지, 게임에서처럼 각자 얼마나 좋은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느냐를 끊임없이 겨룬다. 남들보다 희귀한 물건을 가지기 위해 안달난 듯이, 우리는 서로의 차이점을 찾아냄으로서 만족하기 위해 애쓴다. 오직 ‘그 누구와도 다른 나’만이 스스로를 만족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어디가 같을 수 있느냐?’ 보다 ‘어떻게 다를 수 있느냐?’에 집중한다. 함께 고민하고 있는 일들이 있음에도, 무언가를 같이 해 볼 수 있음에도 그들과 나를 선뜻 한데 묶기가 어렵다. 차이점부터 발견하면서 나와 떼어놓으려 하기도 한다. ‘타인과의 대조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나’는 이제 ‘푸딩카메라 닮은꼴 찾기’에서만 타인과의 공통점을 찾고 있다.

“차이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고, 더 나은 사고를 한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것에 매달리기 보다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기에, ‘차이’란 것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고 했던 바디우의 말처럼, 우리에게 차이란 원.래.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차이를 확인하는 그 순간 이미 또 다른 차이를 만들기에 급급하다. 충분히 서로 다른 우리에게는, 옆에 있는 사람을 스캔하며 우열을 가르기보다 수많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관통하는 ‘공통점’을 찾아가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5월의 멘붕에 이어질 2, 3차 멘붕은 무한 구별 짓기를 멈추고 우리 ‘함께’ 무얼 할 수 있는지를 찾는 데서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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