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한 번이라도 좋은 선배일 수 있었을까

| 덕배 

졸업을 코앞에 두고서야 내가 대학을 다닌 6년 동안 최소한 5년은 선배였음을 기억해냈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했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는 말이,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좋은 선배였느냔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나는 과연 좋은 선배일 수 있었을까.

대학에 오기 전부터 나는 적어도 ‘깨어있는 시민’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사회‧문화’ 시간이면 기능론 보다는 갈등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날 발견했고, 정치인들을 혐오하면서도 투표를 해서 저 썩은 것들을 다 바꿔야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는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내 세계관은 막연했고, 표리부동했으며 모순적이었다. 내겐 세상을 보는 관점은 없었고 삐딱하게 보고자 하는 욕망만이 있었던 셈이다.

새내기 시절, 하나같이 답답해 보이는 선배들 중에서 내 속을 시원하게 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학생 운동’이라는 걸 하고 있었고 ‘사회’며 ‘변혁’이며, ‘혁명’을 이야기하는 이들이었다. 그중 몇은 조국통일을 외쳤고 몇은 노동해방이야말로 우리의 소원이라 말했다. 이상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그 선배들을 좋아했다. 오직 그들만이 내 욕망이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건강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운동하는 선배’들을 따라다녔다. 흔히 만나는 주위의 몇몇 ‘보통’선배들은 나를 걱정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과 싫어하는 선배들은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선배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렴! 그때는 내게 가장 좋은 선배가 누군가에겐 가장 위험한 선배로 보인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택과 동두천, 광화문과 서울역, 시청과 명동 바닥에서 ‘데모’를 하고 선배들과 함께 소주를 마시는 동안에도 나는 즐거웠다. 드디어 내가 대학생이 되었구나.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로서 공동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날 흥분시켰다. 그러나 그러면 뭐하나, 나는 선배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반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이 나를 ‘선동당한 군중’이나 ‘순진해서 이용당하는 새내기’로 보아도 딱히 쏘아붙일 말이 없었다.

몇 년간 수배생활을 하다 감옥에 다녀온 한 선배를 만난 것도 새내기 때였다. 선배는 늘 ‘디스’라는 담배를 피웠는데, 검소한 차림에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형형히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치기어린 스무 살의 내게 그 선배는 무서운 상징이었다. 이렇게 계속 ‘데모’를 하다보면 저런 사람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워낙 고학번이기도 했거니와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선배 앞에서는 내 속 마음이 모두 들키는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지금은 다소 소원해진 사이지만, 아직도 그 선배를 생각하면 처음 그 선배를 만난 때가 떠오른다. 대충 자기소개를 하고 선배와 함께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 선배가 내게 물었다. “넌 꿈이 뭐야?” 첫 만남에 오글거리게 그런 질문을 하다니, 정말 구식이다. 속으로 뜨악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자가 되고 싶어요.” 그 대답에 돌아온 한 마디. “아니, 희망 직업 말고. 그럼, 기자가 돼서 뭘 하고 싶은데?” 그거야 당연하지, 기자가 되면! 까지 생각을 하자마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뭐라 이야기할 것이 없었다.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하며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다니던 내가 “기자가 되어서 적당히 월급 받으면서 사회적 영향력과 명예를 누리고 싶다.”라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면 대체 뭘 할 수 있나 생각해봐도, ‘우리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고 싶다.’는 하나마나한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주워 들은 대로 ‘노동해방’같은 걸 이야기했으면 훈훈하게 대화가 마무리될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면 노동해방이 뭔지, 왜 그것을 꿈꾸는지를 대답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난 내 6년간의 대학생활은 그 질문의 대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럴싸해 보이는 ‘대답의 문장’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 남은 그 선배는 내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사람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선배의 단단한 눈빛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대답하고 대답을 바꾸고 또 대답했다. 그것이 내 공부의 이유였다. 내 삶의 의미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면서, 나와 이 세계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시시껄렁한 일들에 괜한 말을 보태는 것이 늘 부끄러웠다.

정말이지, 때로는 단 한 번의 부끄러움이 한 사람을 바꿔놓기도 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많은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내 삶에서 적용될 진실들을 몇 얻었을 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바뀐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단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실 중 하나다. 내가 그 선배를 만나서 바뀌었으므로, 그 선배 역시 다른 선배를 만나 바뀌었을 것이므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마도 많은 선배들은 이 진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좋은 선배를 만나야 한다.”는 말을 그리도 자주 했던 것일 테다.

스무 살의 나는 여전히 내 삶의 나침반이다.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항상 그 바늘 끝이 섬세하게 떨리고 있다. 북극이 요동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나침반 바늘이 흔들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안다. 바늘 끝이 떨리지 않는 나침반은 더 이상 북극을 가리키지 않는 나침반이고, 그래서 얼른 버려야만 옳은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스무 살의 내가 그랬다. 청춘의 치기를 견디지 못해서 말썽을 일으키고 돌아서고 또 다시 돌아가는 삶의 연속이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청춘이지만 더 이상 스무 살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이들의 말에 이전보다 훨씬 관대해졌고, 더 쉽게 타협하곤 한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고통에 몸을 떨고, 내 바로 옆의 불의에 분노하며 평생을 살기란 너무도 고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을 살아내었기에 스무 살의 나를 여전히 기억한다. 그 젊은 날을 사랑했다가 부정했다가 다시 보듬어 안는 것이 지금 내 삶의 ‘떨림’이다. 스무 살을 잊는 순간, 더 이상 그 청춘에 나를 비추어 보지 않는 순간, 나는 완전히 좌초할 것이다.

이십대 초반에 치열하게 고민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면, 아주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품지 못했다면 나는 평생을 표류하며 살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졸업을 앞두고 이제는 하릴없는 욕심을 부린다. 나도 대학에 다니며 만난 그 누군가에게라도 ‘아주 대답하기 힘들어 삶이 바뀌어버릴 만한 질문’을 쥐어준 적이 있었다면. 평생을 간직할 만한 나침반을 만들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그러나 내게 주어진 질문에도 여태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내가 곧 졸업이라는 걸 한다. 이제 그 욕심을 채울 기회는 몇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과연, 단 한 번이라도 좋은 선배일 수 있었을까.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