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대학언론이란 무엇인가

| 우혁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학 언론의 독자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혹여나 “그런 것 나는 모르고 관심 없고 읽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픈 학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도 대학 언론의 독자다. 대학을 다니지 않으면 모를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여러분이 내는 등록금에는 중대신문과 학교 방송국 UBS, 영자신문사인 헤럴드의 운영기금이 얼마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참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지 알아둬도 손해 볼 건 없을 것이다.

‘대학 언론’이란 무엇인가?

대학 언론이란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 발행하며 학내 문제를 주로 보도하는 매체를 말한다. 그 소속과 성격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하면 ① 학교 본부의 산하에 있는 매체(학기 중 주간 발간되는 <중대신문>, 학교 방송국 <UBS>, 영자신문사 <중앙헤럴드>), ② 학교 본부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 편집권을 지니며 학생들이 만드는 매체(교지 <중앙문화>, 여성주의 교지 <녹지>), 또한 ③ 대학언론의 기자가 아닌 일반 학생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하는 활동인 대자보와 현수막 게시도 크게 ‘언론 활동’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으며, 여러분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잠망경>과 같은 비공식 독립매체 또한 학내 언론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언론의 핵심적 역할은 ‘사실 보도’와 ‘비판’ 두 가지다.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 대해 파편적인 사실들의 조각을 엮어내어 ‘진실’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사실보도’라면, 공익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그 옳고 그름을 따져 묻는 것을 ‘비판’이라 하겠다. 또한, 언론은 사람들의 ‘알 권리’를 대변해 정책이나, 어떤 결정사항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정보로부터 소외되어 피해입지 않도록 그것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바로 선 언론은 시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데 꼭 필요하다.

대학 언론의 역할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관심을 반영해 학생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한편, 학내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회· 학내의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해 진실을 알리고 그것이 학생들의 입장에서 어떠한 일인지를 논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위태로운 대학 언론

지금까지가 당연한 이야기, 일반론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각론이다. 대학 언론은 위태롭다. 얼핏 보면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학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으로 인해 ‘비판’이라는 언론의 역할을 기성 언론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언론’이라는 간판을 달아주기가 부끄러운 경우도 적지 않다. 하나씩 짚어보자.

①은 대학 본부에 재정을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매체의 발행 비용, 기자들의 원고료, 기자 교육, 간식 제공과 봉사학점 인정 같은 소소한 혜택들 모두가 대학 본부로부터 나온다. 본부가 ‘돈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자칫 학교 본부의 ‘홍보지’가 될 위험에 처하기 쉽다.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따져보지 않고 학교 교직원들이나 관계자들의 ‘변명’을 그대로 싣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간교수의 내용검열을 받는 대학 언론도 존재한다.

②는 재정을 비롯한 존립 기반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재정과 그 위상이 항상 불안정하며 발행 주기가 길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만큼 취재·편집·발간 과정에서 학교 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온전히 학생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중앙대의 자치언론인 교지 <중앙문화>와 <녹지>는 매 학기 학생들이 자율납부한 교지 대금으로 편집·발행을 한다. 가끔씩 신입생 때로는 재학생들도 등록금 고지서 옆에 붙은 ‘중앙문화 및 녹지’항목이 뭐냐고 묻는 경우가 있는데, 교지 대금이고 납부는 자율이다.

③, 학내에 붙은 대자보와 현수막은 학생들이 일궈 온 대학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지만,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못마땅한 학교 측에서 학칙을 근거로 학생들을 위협하거나 부착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대에서는 <학생홍보물 게시에 관한 시행규칙> 제7조에 “허가받지 아니하고 게시물을 부착할 경우 학칙에 의거 징계한다”는 규정이 있어 게시물을 부착하려면 담당 부처에 가서 ‘도장’을 받아야 한다. 도장을 받기 위해서는 내용을 ‘검열’ 받아야 하며 그 기준은 자의적이다. 당연히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일이다.

학습된 무관심

사실, 대학 언론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독자인 학생들의 무관심이다. 우리는 ‘권리’를 주장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권리가 없는 상태에 오히려 익숙하다. 그렇게 자라 왔다. 내 문제에 관한 결정은 누군가가 대신 내려 준 결정이며, 그 결정에 따르거나 약간의 ‘일탈’을 하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 대학까지 오는 과정이다. 학내 언론이 학생들의 권리가 침해받는다고 보도해도, ‘학습된 무관심’을 가진 상당수의 학우들은 이를 내 문제가 아닌 남의 문제로 여기거나, 그쯤 침해받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가지기 쉽다.

또한 대학을 유예된 곳으로, 대학은 내 미래 곧 취업에 대해서 준비하는 곳이고, 여기서 내가 해야 할 것은 오직 ‘취업 준비’로 여기는 태도도 무관심의 한 원인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공동의 생존을 위해 할 일이 있다. 전자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자에 얽매여 후자에 무관심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매 학기 초마다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등록금 납부와 수강신청이 그 좋은 예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싼 등록금을 내야 하는 상황, ‘광클’해야 원하는 강의를 겨우 들을 수 있다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점의 +에 목을 메거나, 알바를 하거나, 새벽부터 일어나 수강신청이 잘 된다고 소문난 법학관 컴퓨터실로 향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개인적인 해법인 셈이다.

하지만 ‘대학 등록금이 물가상승률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매년 인상되어 왔고 터무니없이 비싸므로 이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해 교육부와 대학 본부를 압박하거나, ‘교양·전공 강의수를 지금보다 더 늘려 듣고 싶은 강의를 가능한 들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학교 당국에 요구하는 ‘공적’이며 ‘정치적’인 해법도 있다. 대기업 회장님도 대통령도 무서워 하는 것이 바로 그 ‘여론’ 아니던가. 또한 수강신청 광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장학금을 받아내는 것이 내 옆의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가능한 일이라면, ‘함께’ 권리를 누리는 방법은 이것이 아닐까.

문제의 성격에 따라 풀어가야 할 방법이 다름에도 개인적인 해법, ‘각개전투’에만 골몰하는 것이 요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여 씁쓸하다. 공적이며 정치적인 문제 해결 과정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언론, 대학 언론이라 한다면 문제의 당사자인 학생들이 대학 언론에 무관심한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객관’과 ‘중립’이라는 알리바이

대학 언론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표하는 학우들 중 일부는 대학 언론이 ‘정치적’이거나 ‘편향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언론은 모름지기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하는데 너희는 편향적이며 정치적이고 너무 학생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독자의 피드백(feedback)에 목말라 있다가 저런 소리를 들으면 무척 억울하다. 두 가지만 말하자. 첫 번째, 그게 어때서? 두 번째, ‘중립’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지 않다. 무엇을 쓸 것인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미 ‘입장’과 ‘판단’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방송의 뉴스 편성, 신문과 잡지의 지면에 실린 기사들은 누군가가 그것이 보도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선택’의 결과이고 그것이 ‘편집’ 과정이다. 사람이 내린 선택에 그의 입장과 판단이 개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등록금을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여성과 남성 등 각자의 위치에 따른 이해관계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고3이 된 사람과 대학에 입학해 새터에 온 사람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정보가 확연히 다르듯 말이다.

또한 학내 모든 구성원들의 이해관계 전부를 균형 있게 반영한다면 그것은 중립이라고 볼 수 없다. 학내 구성원들 간에는 언제나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 구성원이 많은 학과가 적은 학과의 관계, 학교본부와 학생회의 관계 등은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인 양자의 갈등 사안을 50:50으로 전달하는 것은 기계적인 중립에 불과할 뿐이다. 논술 선생님도 말하신 적 있다. ‘양비론’은 안 된다고. 그리고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미래다.

오히려 ‘중립’과 ‘객관’은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을 때의 ‘알리바이’로 자주 이용된다.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 또는 기업, 학교 본부, 정권 등 언론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권력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꺼려지지만 그렇다고 언론이라는 간판을 내건 상태에서 뭔가 보도는 해야 할 때, ‘중립’이라는 가면 뒤로 숨으면서 제 책임을 방기하는 경우가 많다. ‘중립인가 아닌가’보다 그 뒤에 편하게 숨고자 하는 태도를 경계하고, ‘대학 언론은 과연 누구의 입장에 서는가’를 따져보는 것이 현명한 독자의 태도일 것이다.

나가며

새내기 때를 돌이켜 보면, 그랬던 것 같다. ‘대학에서 무엇을 배울까?’보다, ‘내 대학 생활은 어떨까?’가 더 궁금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막연한 동경이 구체적 현실이 되면서 그 기대는 수그러들었고, 그 즈음 여기보다 다른 어딘가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른 학교라면 다를까 생각해보기도 했고 다른 활동들에서 뭔가를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학교 바깥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여기를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 준비하는 공간으로만 여기고 그 때 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못 했다는 아쉬움 말이다. 그건 고등학교 때의 태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새로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학우들이 다시 막연한 그곳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하거나 동경하기보다 맘에 들건 그렇지 않건 간에 지금 여기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더 마음을 쏟았으면 좋겠다. 지난했던 입시 과정을 거쳐 오면서 품었던 ‘이곳’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길 바란다. 학내의 여러 매체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좋은 독자가 되는 일은 ‘지금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물론 직접 만드는 편이 더 재미있다). 새로이 학내 언론의 독자가 된 여러분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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