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에게 말걸기] 둥지를 떠나 나무 바로세우기

| 버드나무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면 새내기 새로 배움터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옆 짝꿍과의 소통에 실패해 고개 숙일 즈음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오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뻘쭘함을 덜어주고자 우리가 이 책을 당신의 손에 쥐어줬다. 나도 새터 가 봐서 안다. 그 순간은 정말 누구한테나 온다. 이름이 뭐예요? 어디 사세요? 수시예요, 정시예요? 취미가 뭐예요? 입사지원자의 앞에 선 면접관마냥 신상을 캐묻고는, 더 이상 주고받을 말이 없어지는 그 순간. 전날까지 새터를 가야겠다, 가기 싫다 잎사귀 떼며 고민하던 내가 떠오르고, ‘잎사귀가 하나만 더 있었어도!’ 하고 후회한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와버린 것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새터를 갔던 게 햇수로 5년 전인데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사람을 대하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순간의 막막함, 생소함이 내게는 이전에 없었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터를 입학식 이후에 가지만, 내가 입학한 2009년까지만 해도 새터 다음이 입학식이었다. 즉 새내기 정모 같은 비공식 행사를 제외하면, 새터 출발을 위해 대운동장에 집결하는 순간이 공식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모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흑석동도 캠퍼스도 동기들도 전부 처음이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어 대운동장의 차가운 돌바닥에 홀로 앉아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특별히 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출발이 지연되고, 선배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단체 사진 찍자고 난리였다. 어찌어찌 버스에 올라타고, 새내기와 선배 단위가 함께 짝을 지어 앉았다. 그런데 선배 단위가 부족해 새내기끼리 앉는 경우가 있었고, 애석하게도 그게 나의 경우였다. 내 짝꿍은 남자 동기였다. 쳇. 게다가 재수한 형이었다. 아. 하필이면 내 짝꿍은, 무뚝뚝하기로 팔도에 소문난 부산 남자였다! 쫌!!!

고등학교 때까지는 누구와 친해지기 위해 끙끙대며 시도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굳이 그럴 이유가 있었나? 친구가 되기 힘든 사람이라면 친구 안 하고 말지. 그러나 그때 버스에서 나는 옆자리 부산 남자와 말을 트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점심 혼자 먹는 게 싫어서, 그랬다. 나는 나와 함께 밥을 먹을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부산에 대해 유일하게 알았던 롯데 자이언츠 얘기 꺼내가며 좋아하지도 않는 야구 얘기를 했더랬다. 그 순간에야 알았다. 누군가를 필요로 해서 접근하는 경우도 있구나. 학창시절에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작업’거는 것도 의도적으로 피했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인위적인 작용 없이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터에 가는 것도 실은 불편했다. 낯선 사람과 2박 3일을 함께 지내야 한다는 조건이 선뜻 다가가기에 쉬운 조건은 아니었으니까. ‘새터 안 가면 아웃사이더 된다’는 주변의 이야기에 떠밀렸다. 사실 이때부터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수단적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합격한 이후 어른들은 내게 대학에 가면 인맥을 넓히라고 권하곤 했다. 나중에 사회로 진출했을 때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그 즈음 불면증 치료 목적으로 책을 읽곤 하던 주변 친구들도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는 데 열중했다.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인맥을 넓혀야 한다는 관념이 내게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다가와 있었다. 새로운 관계 맺기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날 흔들었다. 난 주목받아야 했다.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과에서 ‘입지’를 얻기 위해. 그래서 나는 새터 ‘1조’에서 조장에 자원했다. 20년 인생동안 ‘장’이라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반장뿐이었을 정도로 누군가를 대표하는 걸 꺼려했던 나다. 친구를 사귀는 데 ‘성공’했다는 성취감과, 너무 나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과, 알코올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을 남기고, 2박 3일이 그렇게 지났다.

내가 바랐던 대학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4월이 될 무렵 대학에 처음 실망했다. 이런 대학에 잘 적응한 내게 실망했다. 4월 이후에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과내 토론 소모임에만 참석했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왔고, 동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학교에서 밥 먹는 것이 너무 불편해 2학기에는 모든 수업을 점심 이후로 잡기도 했다. 마음 맞는 동기 몇 명과만 지냈다. 순식간에 1학년이 지나고 겨울방학이 왔다. 학교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교지 <중앙문화>의 예산이 삭감되고, 상식적이지 않은 구조조정이 강행됐다. 학교 커뮤니티에는 이런 비상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범람했다. 저항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 무엇을? 관계 쌓기를 거부했던 내게는 저항을 함께 할 사람도, 조직도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인맥’으로 보았을 때, 그건 기성사회의 명령이었다. 인맥을 쌓지 않으면 실패할 거야, 상대를 이용하지 않으면 네가 이용당하고 말 거야, 순수한 관계라는 건 허상일 뿐이야.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 세계의 얄팍한 룰이었다. 내가 룰을 거부하고 순수한 관계를 찾아 돌아온 시기는 말하자면 세계를 떠나 나의 옛 둥지로 다시 숨어들었던 시기이다. 둥지 속에서 몸을 움츠리고 앉아 둥지가 걸린 나무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둥지가 아무리 안전한들 나무가 무너지면 무슨 소용일까. 그때 문득,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달았다. 둥지를 보호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함께 나무를 다시 세울 누군가가 절실했다. 인맥 쌓기에 의한 관계 맺기가 필요에 의한 관계 맺기라고 거부했으면서, 나는 이제 와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내게 실망하지 않았다. 거북스럽지도 않았다.

연대하고 싶었다. 인맥의 논리와 연대의 논리는 ‘필요’의 차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깊이의 차원에서 전혀 다른 논리였다. 나무가 무너지고 끝내 둥지가 추락하는 일을 관망하며 다른 둥지를 찾아 헤매는 일이 인맥의 논리라면, 연대는 나무를 다시 세우는 일이고 마침내 둥지를 지키는 논리였다! 그 논리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동일시하던 때도 있었다. 동지(同志)로 불리기보다 친구라고 불리길 바랐던 때도 있었다. 연대(連帶)라는 단어를 쉬이 쓰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두 단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던 탓이다. 섣불리 발을 내딛기 힘든 미로 같았다. 하지만 폭력에 부딪혀 저항의 필요를 느꼈을 때, 두 단어는 가장 가볍게 내게 다가왔다. 같은(同) 뜻(志)을 공유하는 파편들이 잇닿아(連) 띠를 이루는 일(帶), 두려워 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