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을 읽고] 꾸며진 희망 말고 있는 그대로의 희망을

| 헨드릭스

버드나무가 쓴 특집 기사 ‘인문대 선거 무산, 학칙에 짓밟힌 학생자치’의 마지막 문단을 보면, “중앙대에서 학생 자치에 허락된 땅은 이제 한 뼘 정도이지만, 다시 모든 땅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 뼘이면 충분하다”라고 쓰여져 있다. 또한 단야가 쓴 ‘중앙대학교에 표현의 자유는 없다’를 보면, “비판받지 않는 권력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와 같다. ( … ) 이제 중앙대라는 열차의 브레이크를 닦고 기름칠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수려한 비유로 기사를 끝맺는다. 다른 모든 글들도 추상적인 희망을 언급하며 글을 끝맺는다. 한결같이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잠망경>은 사건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에는 발군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에만 지나치게 집중하여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느낌이다. 해결 방안을 탐구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는 소홀하다는 인상이다.

물론 독자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다시 모든 땅을 되찾기 위해서는 한 뼘이면 충분하다”는 식의 추상적이고 희망적인 결말은 아무래도 찜찜하다. 외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독자들이 레토릭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희망적인 메시지에 쉽게 안도감을 느끼고, 그대로 안주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보다 필요한 것은, ‘어떻게’ 다시 우리의 권리를 회수할 것인지에 대한 현실적이고 세부적인 고민들이다. 현재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선행되었으니,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각도로 관찰해보고 소개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9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잠망경>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비평에만 치중할 뿐 대안을 탐색하고 논의하는 모습은 결핍되어 있었다. 그나마 9호에서 독자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해 준 기사는 짱큰콩이 쓴 ‘바통타-치’가 유일했다. 이 글은 ‘산재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쟁취’라는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반올림’이라는 단체를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간략하게 단체의 이름만을 언급했을 뿐인데, 다른 기사에는 보이지 않는 구체적 방향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여서 꽤나 반가웠다.

학내에는 무너진 학생자치를 복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구성원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가 속해 있는 ‘의혈, 안녕들 하십니까’가 그 예이다. ‘의혈 안녕’들은 지난 12월 이후 약 5개월간 많은 일들을 했다. 학교가 청소노동자들에게 신청한 100만 원 가처분 소송에 반발하여 100만 원짜리 대자보 기금활동을 진행했으며, 헌법을 위반하는 비민주적, 반인권적 학칙들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하는 토론회를 열기도 했으며, 학교 당국이 걷어버린 대자보들을 모아 학교 본부에 전달하는 대자보 전달식을 갖기도 했다. 하나 하나 열거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학내에는 희망적인 움직임들이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움직임들을 하나로 묶어서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고리가 <잠망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면 여건상, 인력 여건상 편집 방향에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조금은 힘든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판에 투자하는 에너지를 조금만 줄이면 된다. 비판을 조금 줄이고, 학내에서 벌어지는 희망적인 움직임들을 포착하여, 거기서 진정한 희망을 독자들에게 전달했으면 좋겠다. 비유와 은유로 만들어진 문체상의 기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희망 말이다.

<잠망경>이 희망적인 사건들을 취재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한가지 더 있다. 잠망경은 시종일관 날카로운 비평을 토해낸다. 두산 재단, 학교 본부, 마스터키 선본, 중앙인 커뮤니티 등등, 학교를 구성하고 학교와 관련이 있다면 주체를 막론해 그들의 잘못을 꼬집는다.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잠망경>의 날카로운 분석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잠망경은 학교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일단 감지하면 과감하게 폭로한다. 비판적 시각을 통해 학생들의 경각심을 제고하며 독자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비판 일색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거센 비판에 계속 길들여진 독자들은 점차 그 자극에 둔감해질 수가 있다. 아무리 글쓴이가 사태의 심각성을 역설하더라도 독자들은 그저 그 비판 일색의 분위기에 길들여져서 어떠한 심각성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독자들에게는 <잠망경>이 비판을 위한 비판만을 일삼는 떼쟁이로 인식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잠망경>이 주구장창 늘어놓는 비판은 외려 독자들에게 피로감만 쌓이게 하여, 학교를 개선시키겠다는 전의 자체를 상실하게 할 수가 있다.

학내에 어두운 부분이 있으면, 밝은 부분도 반드시 존재한다. 지금까지의 <잠망경>이 사냥개 같은 면모로 학내의 부조리한 모습만을 좇았다면, 앞으로는 그 부조리에 꿋꿋하게 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조명해주었으면 한다. 마땅히 칭찬 받아야 할 것은 화끈하게 지지하고 치켜 세워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용감한 투쟁에 감화를 받은 독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가 힘을 실어주었으면 한다. 이러한 긍정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 또한 언론 매체의 중대한 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잠수함 토끼들은 조금 덜 예민해져도 된다. 꽁꽁 얼어붙은 공론장에 숨통을 틔우는 것에는 한가지 방법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자. 세계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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