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침몰은 여기서 계속된다

| 짱큰콩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5월 11일 현재까지 275명의 사망자가 확인되었고 29명의 생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172명의 생존자는 지금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애도를 표했다. 정부도 애도를 표했고 언론사들도 애도를 표했다. 그들은 실종된 이들의 생환을 기도하는 노란 리본을 달기도 하고, 분향소에 찾아가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헌화하기도 했다.

한동안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선장의 비도덕성, 박근혜 정부의 미숙한 대응, 그리고 몇몇 ‘용납할 수 없는 장난질’에 대한 비판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말들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그러니까, ‘선을 넘어선 분노’는 용납되지 않았다. 오직 한 사건에 대한 애도만이 허용됐다. 그저 ‘안타까운 일’을 넘어서 이후 모두의 일상을 침범할지도 모를 외침과 행동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뉴스 앞에서 충분히 애도하고 흐느끼다가, 우리는 늘 그렇듯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찌됐든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또 다른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삶을 회의할지도 모른다. 연민의 감정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뉴스가 만든 눈물 그 자체는 생각보다 힘이 없다.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세월호의 운항을 책임진 선장은 1년짜리 계약을 맺은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위기상황 발생시 선장이 현장을 전두지휘하는 일반적 상황과 달리,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 다수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된 상황에서 선장은 직접적인 지휘 권한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시각 조타실에서 단독운행을 했던 정규직 3등 항해사 박모 씨는 그날 처음 맹골수로를 운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러 악재 속에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선장을 포함한 항해사들과 승무원들은 ‘혼자 살기 위해’ 탈출을 감행했다. 문제의 원인을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탓으로 돌리기는 힘들어 보인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혼재로 인한 문제로만 보기도 힘들어 보인다. 둘 다 문제였으나 둘 중 하나의 문제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정규직-비정규직의 고용형태와 혼자 살고 보겠다는 도덕성의 문제가 과연 이번 사건에만 한정된 것일까.

‘가만히 있으라.’ 이것은 세월호 침몰 초기 탑승객들에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안내한 방송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재난 대책에만 등장하는 말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만히 있으라. 너의 일이 아니니 가만히 있으라.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익숙한 말 아닌가. 지난 해 바로 이곳, 중앙대에서 있었던 사건들만 봐도 그렇다. 학문단위 구조조정과 청소노동자 파업이 있었을 때 한편에선 지지의 메시지들이 캠퍼스 곳곳에 들리기도 했지만, 학교의 발전을 위해, 비용 절감을 위해 기꺼이 사건을 외면한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사회화’라고 한다면 우리가 받았던 사회화는 타인과 살아가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었다. 탑승객들을 배에 남겨두고 탈출했던 선장과 승무원들은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을까. 아니다. 애도를 표한 모든 이들이 그랬듯 그들 또한 윤리적 죄책감과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의 그 무엇이 ‘가만히 있으라’는, 마음 속에 오래 박힌 강령을 소환했을 것이다. 경쟁을 부추겼던 학창시절의 교육시스템에 적응하고,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는 소비자로서 취업경쟁에 몰두하라고 주문받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침몰은 지금 이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누구든 선장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세월호만의 일이 아니다. 여기, 우리의 일이다. 대학은 정의와 진리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믿어온 한 학우는 결국 자퇴했다. 세월호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동시에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의 이야기보다는 기계적 이윤의 논리를 좇는 모 학교 총학생회장의 선언은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뀌지 않는 한, 바꾸지 않는 한 침몰은 계속된다. 배가 기울어 가는 상황에서도 서로의 구명조끼를 여미어 주던 그들처럼 타인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껏 해온 것처럼 익숙한 강령에 순응하며 홀로 배를 탈출할 것인가. 우리가 깨우치지 못하면 세월호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여전히 후자가 반복되는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밖엔 없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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