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이내창 이후의 세월호, 세월호 이후의 이내창

| 버드나무

 

생각보다 관은 더 깊이 묻혀 있었다. 한참을 파낸 뒤에야 관 뚜껑이 나왔다. 뚜껑 위에는 ‘내창이 형’이 생전에 썼던 뿔테안경이 온전하게 놓여있었다. 후배들은 흙먼지로 뒤덮인 안경을 빗물에 씻겨냈다. 관을 열고 수의를 열어 유골이 드러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백발 성한 선배의 큰형님과 후배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큰형님은 “내창아 미안하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들은 울음을 멈췄다. 새로운 관에 몸을 뉘인 고인은 운구차에 실려 서울로 향했다.

 

무너진 국가에 돌아오다

8월 15일, 이내창 선배가 정든 광주 망월묘역을 떠나 이천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으로 묏자리를 옮겼다. 애초 지난 4월 5일 이장할 계획이었지만, 주무기관과의 갈등으로 미뤄져 광복절이자 그의 기일인 8월 15일 이장이 이뤄졌다.

그 네 달 동안 한국은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됐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의 결과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절규에 가까운 비판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300여 명의 생명이 바닷속에 가라앉은 비극은, 그러나 200일이 더 지난 지금도 변한 것이 별로 없다.

유가족은 곡기를 끊어가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되는 특별법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응하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수사하느냐고 조롱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일은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특별법이 표류하는 동안 여론도 둘로 나뉘었다. “떼쓰지 말라”, “유가족이 벼슬이냐” 같은 비아냥이 유가족들의 면전에서 쏟아지는 일도 빈번했다. 참사 200일에 다다라서야 ‘세월호 3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나마도 반쪽짜리 법안이다. 기소권과 수사권은 끝내 보장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시점에 이장 행사를 통해 이내창 선배가 돌아왔다. 그에 대한 기록을 돌아보면 마치 그가 일부러 넉 달을 기다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으로 후배들을 ‘끈덕지게 어깨동무’(이내창기념사업회 소식지 제목)하게 한 ‘열사’ 이내창은 25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에게 역사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 없이는 진상을 규명할 수 없다는 교훈 말이다.

 

중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

이내창 선배는 1989년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다. 예술대학 조소학과 86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25살 늦깎이 신입생이었다. 다른 대학을 다니다 군대를 갔다 온 뒤 다시 대학입시를 치러 입학했다. 그 시기 대학생들이 대개 그랬듯, 그도 ‘운동권’이 되어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수업과 조소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아 학과 수석을 곧잘 차지하던 그는, 적극적인 성격까지 갖춰 주변의 신망을 두루 갖췄다. 그런 선배가 총학생회장에 추대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88년 겨울, 그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학생사회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아침마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아 유인물을 건네고 연설했다. ‘모든 학우를 세 번씩 만나겠다’는 각오를 입버릇처럼 말했다. 여름방학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점차 희망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2학기 개강을 앞두고 희망은 끔찍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8월 15일은 ‘민족해방절행사’라는 명칭의 큰 행사가 예정된 날이었다. 이내창 선배도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전날인 8월 14일 저녁 수원에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그는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다른 곳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5일 저녁에야 다시 나타났다. 저 멀리 전라남도 여수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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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지 않은 의문사, 수사권 없는 위원회

의문사였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황은 있었다.

수원에서 큰 행사가 있는데 여수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탄 배의 승선신고서에는 선배와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직원의 이름이 오전 8시에 탑승했다고, 선배의 필체로 적혀있었다.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선배는 배 안에서 몇 명의 사내들에게 감시당하다가 내리자마자 급하게 도주했다고 한다. 오후 3시에는 다방에서 안기부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발견된 시신 곳곳에는 심하게 얻어맞은 상처가 있었다. 웃옷은 벗겨져 시신 근처에 버려져 있었다.

중앙대 학생조사단이 밝혀낸 이러한 정황들은 하나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기부 직원이 그를 죽였다는 것 말고 달리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명백한 정황은 증명되지 못했다. 수사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 12년이 흘러 정권이 바뀌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 활동이 시작됐다. 위원회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확인해줬다. 예술대학 선배인 차일환, 홍성담씨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작품전시비용을 총학생회가 부담했고, 그 경위를 경기도경찰청이 입수해 중앙대학교를 내사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위원회는 조사권만 있었고, 안기부를 수사할 권한이 없었다. 안기부는 당시 동행했던 직원의 행적이 적힌 문건 등 내부 문건의 공개를 거부했고, 끝내 증거를 찾지 못한 ‘이내창 의문사 사건’은 ‘미결’로 마무리됐다.

 

더 낫게 실패하라

이내창 선배뿐만 아니라 수많은 의문사 사건 조사가 그렇게 끝났다. 제1기 위원회가 조사한 82건 중 19건만 ‘민주화 운동 관련 의문사’로 인정됐고 63건은 기각되거나 조사불능으로 판명됐다. 제2기 위원회도 44건 중 11건만 인정되는 등 무력하게 종결됐다. 그나마도 진실이 규명된 사건들의 가해자는 특정되지 않았다.

문예창작학과 88학번이면서 2학년 때 이내창 선배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지금까지 국가폭력과 의문사 사건을 주제로 연구해 온 정원옥 박사(중앙대 문화연구학과)는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 사건과 애도의 정치>라는 제목의 박사논문에서 위와 같은 위원회 활동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실패’로 규정했다. 그는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말을 인용한다. “다시 실패해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여기서 ‘실패’는 ‘시도’로 치환할 수 있다. 위원회 활동이 실패로 끝난 지점에서 오류를 고치면서 새롭게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낫게 시도하라

다시 세월호로 돌아오자. 우리는 이미 한번 시도했고, 실패했다. 7월 초 실시된 세월호 국정조사를 통해 밝혀낸 것은 거의 없다. 심지어 대통령이 사건 발생 직후 7시간 동안 어디에서 뭘 했는지조차 밝혀낼 수 없지 않았던가? 조사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국정조사는 다시 확인시켜줬다. 더 나은 시도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일이었으나, 이번에도 우리는 실패했다. 하지만 더 나은 시도를 할 기회는 아직 한 번 더 있다.

정 박사는 논문에서 더 나은 법을 만드는 일이 “의문사 문제를 더 공정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될 뿐만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생명권을 함부로 침해할 수 없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생명권을 지키는 일이 된다”고 적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은 의문사가 아니지만, 두 사건은 ‘진상이 규명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국가’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이번에 통과된 특별법은 미흡하다. 여전히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이 남아있다.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앞으로의 과정이 유가족만의 싸움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세월호를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생명권을 지키는’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이내창 선배를 기억하자. 그 수많은 실패의 역사를 기억하자. 이제는 더 낫게 시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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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 잠망경 » [기획] 25년의 시간을 잇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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