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이 시대의 수많은 달팽이를 위하여

| Lou

 

남자친구가 있다. 그것도 (내겐) ‘귀여운’ 연하의 남자친구다. 허우대도 멀쩡한 데다 나름 (내 눈에만) 잘생겼다. 게다가 몇 번의 연애경험이 있는 나완 달리 나를 만나기 전까지 모태솔로였단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흐뭇한 그와 만난 지 500일이 되던 날, 우리는 좀 더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조금은 낯설었던, ‘다큐나이트’ 서른네 번째 상영회 <자, 이제 댄스타임>에서.

왜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사실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 몰랐다. 그저 자유인문캠프에서 주최한다기에 막연히 좋은 주제이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상영관 입구에 다다라서야 영화의 주제가 ‘낙태’라는 것을 알았다. “괜찮아?”라는 내 질문에 남자친구는 “괜찮다”고 했다. 이후 이어진 짧은 침묵. 그리고 약간의 어색함과 긴장감이 도는 미묘한 분위기. 그것이 처음으로 낙태 이야기를 마주했던 우리의 태도였다.

막이 올랐다. 영화는 할머니들의 낙태경험담을 나이브하게, 혹은 화끈하게 들려준다.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의 순간, 장면이 바뀐다. 오늘날 낙태의 경험을 가진 그녀들의 이야기가 하나둘씩 이어진다. 그곳엔 대학생도 있고, 초등학교 선생님도 있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주부도 있다. 모자이크 속 그녀들의 이야기는 “들켜선 안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영화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사회에선 불편하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낙태의 경험담으로부터.

영화 속 그녀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껴갈 즈음, 화면을 채우던 모자이크가 슬쩍 사라진다. 이내 그녀들의 ‘진짜 얼굴’이 카메라에 담긴다. 갑작스레 사라진 모자이크에 혼란스러운 관객들과는 달리 영화 속 그녀들은 누구보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당시를 회상하며 코를 찡긋거리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면서. 지금껏 꼭꼭 숨겨온 이야기를 이제야 얘기할 수 있어 속시원하다는 듯이 말이다. 영화는 오로지 그녀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낙태를 찬성하는 것도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아닌 채 그저 묵묵히, 그녀들이 느꼈던 감정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자, 영화를 보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듭니까?”

‘피임을 잘해야겠다’가 솔직한 첫 번째 대답.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도 아니고, 친구들과 뜨거운 밤(?)을 보내는 방법도 공유하며, 19세를 넘나드는 대화가 자연스러운 내공도 쌓았더니 피임이 제일 먼저 생각나더라. 순간의 선택이 가져올 파장은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다. 어쨌거나 어떤 상황에서든 피임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영화였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가 두 번째 대답. 영화를 보기에 앞서 가장 걱정됐던 것 중 하나는 영화가 지나치게 암울하고 어두우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만 나오면 어쩌나 싶은. 물론 괜한 걱정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소홀히 지나칠 정도의, 그런 익숙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일생일대의 중요한 시험을 앞둔 상황에서 임신을 했거나, 첫째를 낳을 때의 고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 낳을 수 없었거나, 임신한 뒤 남자친구와 이별했거나.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가 세 번째 대답.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답.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나는 아닐 거라고, 나는 아닐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쳤음을 인정한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낙태를 하기까지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을 고등학생 때 낙태 한 내 친구도, 가장 친한 친구의 친구도… 그리고 우리 엄마도. 그들은 혼자 얼마나 아파했을까. 그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낙태의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당시의 자신을 좀 더 사랑해주고 싶다던 영상 속 한 여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국가, 교통사고 1위 국가로 잘 알려진 한국. 잘 드러나지 않은 게 있다면 낙태율도 1위를 다툰다는 거다. 보건복지부의 2010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가임기 여성의 인공임신중절건수는 15.8%에 이른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열 명의 여성 중 한두 명은 중절의 경험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낙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쉽지 않다. 낙태 이야기를 꺼내면 으레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태아의 ‘생명권’과 임부의 ‘자기결정권’의 대립이 되기 일쑤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낙태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가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낙태 경험이, 쉽게 너와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이 됐을 때 우린 당연하게 숨길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의 단면이자 핵심이다.

영화 속에선 달팽이가 자주 등장한다. 달팽이는 자웅동체의 동물이다. 달팽이에게 성의 문제란, 곧 달팽이 자신만의 문제일 거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성별이 나뉜다. 이들에게 성의 문제, 특히 임신과 낙태의 문제는 관계적인 측면이 강조되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임신한 여성들은 달팽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임신과 낙태는 곧 ‘여성’의 선택의 문제가 되며 그 대가 역시 여성에게 전가된다. 남자가 “임신한 거 아니야? 얼른 병원에 가 봐”라고 말하는 순간, 임신과 낙태는 오롯이 여자가 부담해야 할 몫이 된다. 임신은 여자 혼자 한 게 아닌데도 말이다.

영화는 끝났지만 영화의 여운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영화를 본 소감을 묻는 말에,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사회는 큰 아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그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해서”란다. 이 남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의 말대로 이 험난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팽이라는 것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렇게 구조화된 사회 분위기에 침묵하며 암묵적으로 동조해왔으리라.

우리에게 ‘집’이 주는 이미지는 따뜻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아무리 사회가 냉혹하고 무심할지라도 말이다. 달팽이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홀로 외로운 길을 가는 이 사회의 수많은 달팽이에게 이해와 공감이라는 달팽이 집을 선물하는 것은 어떤가. 혹여 우리 곁의 달팽이가 걸음이 느릴지라도, 그 옆을 당신과 함께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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