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잔디 파시즘이 몰려온다?

얀웬리 | 성골 중앙인

 

지난 10월 17일, ‘일방적 구조조정에 맞선 200인 중앙인 원탁회의’가 열렸다. ‘원탁회의’는 구조조정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과 더불어 ‘정문 앞 잔디밭’에서 진행된다는 점 때문에 홍보 단계부터 뜨거운 논란이 되었다. 올해 초 R&D센터의 건립과 더불어 정문 일대를 개비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잔디밭. 거기가 어디 예사 잔디밭인가. 비록 소박한 규모지만 사진의 배경으로 삼을만한 몇 안 되는 포인트이고, 나아가 ‘국내 5위 대학(서연고중성!)’을 향해 나아가는 글로벌 중앙대의 새로운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리하여 행여 잔디 다칠세라 누구 하나 즈려밟지 않고 직각보행을 감수해 오지 않았던가. 학교 측은 애초에 불허 방침을 내렸으나 주최 측은 예정대로 행사를 강행했고, 학교 측은 결국 행사가 끝난 후 3명의 학생에게 징계절차를 위한 ‘학생상벌위원회’ 출석을 요구했다. 그 중 한 명은 지난해 구조조정 반대활동으로 이미 두 차례 징계를 받았던 철학과 김창인 씨다. 그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단 이유로 이제 세 번째 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정치의 소멸을 꿈꾸는 파시스트 대학

중대신문 보도에 따르면 학교 측은 “미허가 집회 개최, 미허가 광고물 부착, 수업 및 연구 활동 방해, 외부인사의 학내초청, 시설물 손괴” 등 다수의 학칙위반을 근거로 상벌위원회를 소집했다. 미허가 포스터는 하루에도 수백 장씩 붙고 있고, 외부인사도 하루에 수백 명씩 중앙대를 드나든다. 애초 기획과 달리 행사 당일엔 30명 남짓의 학생들이 모여앉아 조용히 토론을 진행했으니 수업과 연구에 방해가 되지도 않았고, 잔디밭(시설물?)도 조금 밟혔을지는 모르나 큰 문제는 없었다. 대단한 근거라도 있는 양 늘어놓았지만 결국 요점은 하나다. 애초에 “사전 경고와 집회 불허를 통보”했으며, 주최한 학생들도 이미 징계를 감안하고 행사를 강행했다는 것. 그러니 이제 순리에 따라 징계를 내리겠다는 것.

그러나 학교 측이 내세우는 ‘미허가 집회’라는 규정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학칙 제65조는 학생의 집회 절차와 관련해 “사전 신고”를 하라고 규정되어 있지,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학칙에 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우리 헌법은 원칙적으로 집회에 대한 허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헌법21조2항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개인의 자기결정과 권리의 발현은 물론 여론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불가결의 근본요소’로 인정된다. 즉, 원칙적으로 ‘미신고 집회’는 있을 수 있어도, ‘미허가 집회’나 ‘불법 집회’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오직 집회를 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행위가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미허가 집회’ 운운하며 징계에 회부하는 것은 학칙에 대한 오독에 근거하며, 만약 고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라면 ‘공갈협박’에 해당한다. 나아가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헌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정상적인 중등교육 과정만 이수해도 알 수 있는 ‘신고제’와 ‘허가제’의 법리적 차이를 학교 측이 몰랐을 리 만무하고, 또한 잔디밭에 모여 앉아 몇 시간 토론을 했다고 시설물 손괴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결국 이번 사태는 ‘구조조정 반대 집회’라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제재조치라고 할 수 있다. 두산이 법인으로 들어와 기업식 구조조정을 강행하면서 매일 같이 벌어졌던 일들이다. 상명하달과 일사불란한 처리를 강조하는 기업식 운영은 민주적인 토론과 의견수렴을 거추장스런 절차로 여기며, 비판적 여론은 균형 있는 공론 형성을 위해 필요한 목소리가 아니라 근절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이때 손쉬운 방편으로 징계 등의 행정처리가 동원된다. 억압적인 독재정권도 선거와 법집행 따위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결국 규칙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자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측이 번번이 내세우는 ‘면학분위기 저해’, ‘학교 명예 실추’ 따위의 규정들은 어떤 행위든 처벌할 수 있는 포괄적인 근거로 활용된다. 이때 행정절차는 결국 자의적 권력행사에 외관상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부여하는 알리바이로 동원된다.

 

청년 파시스트들 모습을 드러내다

이처럼 정당성 없는 폭압적 조처를 가능케 하는 것이 대다수 학내구성원의 무관심과 ‘카우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일부 극성인자들의 동조 여론이다. 학교발전에 목매달면서 재단과 학교의 구조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그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을 학내에서 박멸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이들. 이들 훌리건들에겐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모든 움직임이 ‘운동권의 음모’로 간주되며, ‘운동권’이라는 낙인은 마치 수구세력들이 사용하는 ‘빨갱이’처럼 그 자체 ‘악’으로 표상된다. ‘운동권’은 나치 치하 독일의 유태인처럼 시민권을 갖지 못한 내부의 이방인이기에, 어떠한 절대적 증오와 분노의 표출도 정당화된다(‘카우인’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노골적인 언어폭력과 ‘신상 털기’ 행태를 보라.) 그리하여 반대여론을 가진 이들은 애초에 그 공론장을 떠나 버리고, 한 줌의 훌리건들의 의견이 ‘과잉재현’되기에 이른다.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친 ‘카우인’에서 나름 균형 잡힌 반대의견도 제시하면서, 그 공간에서 배제당하지 않는 길이 있긴 하다. “저는 운동권이나 좌파는 아니지만…”으로 시작해 “그래도 자랑스런 중앙인 여러분 사랑합니다.”로 끝마치는 것. 이곳에서 공적 발언권을 얻으려면 사상검증과 충성서약이 전제조건인 셈이다.

이번 원탁회의는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활동하던 이들 청년 파시스트들이 오프라인에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원탁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네 명의 학생들이 근처에서 “왜 잔디밭인가, 왜 시험기간인가, 우리는 당신들의 정치적 놀음의 배경화면이 아닙니다!!”라는 피케팅 시위를 벌인 것. 이들은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학생들을 마치 ‘깨어있는 지성인’인 양 영웅시하는 분위기에 불만을 느껴 “직접행동”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실제로 ‘직접행동’에 나서 원탁회의 홍보 현수막을 손수 찢어버렸다. 학교 측이 불허방침만 내리고 실제적인 제재조치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보고, 불의를 견디다 못해 직접 ‘불법 행위에 대한 처단’에 나섰다는 것. 이는 타인의 사유물에 대한 침해이자 자의적인 폭력행위(‘테러’)에 불과한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를 자랑스레 여겨 스스로 카우인에 전말을 알리고 많은 동조자들이 “행동하는 양심”이라며 칭송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파시즘의 역사를 떠올리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학교발전에 대한 집단적인 강박이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마저 침식하고, 심지어 테러행위에 대한 숭배로 나아가는 결정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무균질의 공간

“왜 잔디밭인가”라는 문제제기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공원에 산책이라도 나갈라치면 늘 밟게 되는 것이 잔디밭인데 무어 그리 안달일까? 물론 이러한 강박적 집착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길게 뻗은 대로와 그 소실점의 끝에 우뚝 솟은 유럽풍의 석조건물은 ‘일류대학’의 상징과도 같으며, 이번에 새로이 조성한 잔디밭은 오랜 콤플렉스의 소박한 해소인 것이다. 이러한 눈물겨운 심리적 동기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정치적 동기도 놓여 있다. 깨끗한 장방형의 잔디밭이 구현하는 공간적 합리성은 ‘질서’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면서 그 공간 내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의 행위를 규율한다. 잔디밭에 들어가는 행위, 신고하지 않은 대자보를 붙이는 행위, 아무 데서나 흡연하는 행위, 공연을 하면서 소음을 일으키는 행위 등 공간의 합리성을 헤친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일탈행위들은 생활공간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 제재하고 억압해야 할 ‘불법행위’로 규정된다. 물론 이러한 원칙은 대개 학교 측에 반대하는 정치적 표현행위에 대해 적용된다.

‘클린 캠퍼스’ 캠페인은 단지 캠퍼스 환경을 미화하자는 차원을 넘어 사소한 일탈행위들, 정치적 표현행위들이 제거된 ‘무균질의 공간’을 꿈꾼다. 그 곳은 학교본부의 위엄이 우선하는 지배질서의 공간이자, 모든 정치색이 탈각된 ‘소비 공간’이기도 하다. 누구도 백화점에 들어가 시위를 벌이진 않듯이, 이러한 탈정치적 공간에서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는 그저 엉뚱한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잔디밭을 집회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암묵적인 상징적 코드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그 자체 매우 유의미한 정치행위다. 이러한 전유행위를 통해 잔디밭은 단순한 관상의 대상에서 구성원들의 정치적 요구와 주장이 오가는 ‘광장’으로 거듭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나아가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마저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권리들에 대한 권리’의 요구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공간에 대한 권리는 출발점일 뿐이다. 이미 주어진 것의 보장을 넘어, 새로운 권리들을 발명하고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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