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복지 총학생회’를 비판한다

extreme / 독자

 

학생회를 정의한다면 헌법이 정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대학에 보편화하고, 구성원의 권익을 위해 존재하며 대학의 배분적 정의를 학문적 성과와 조화시키는 역할을 부여받은 가치지향적 정치조직이라고 하면 무리없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어느 계층, 조직을 막론하고 당사자들간의 이해관계의 대립을 전제로 하여 이익의 충돌을 해결하고 합리적인 공존을 위한 각각의 조직을 만들어 왔다. 주요 이익의 실현을 위해 대표권을 부여하고 자치권이라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대학에 있어서는 노동조합이, 교수협의회 그리고 학생회가 계층적 이익을 대변한다.

2012년을 이끌어가는 카우V 총학생회는 “학외 활동보단 학생 복지 위주로 학내 이슈에 집중할 것”을 주요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학생회라 하니 그 정책적 실체와 지향점이 꽤나 모호하다. 복지는 무릇 분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한 정책적 선택의 문제다. 즉 복지는 정치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기에 다수의 이익적 공감대에 존재하고, 학생자치단체가 학생복지를 지향해야 함은 목적의식이 결여된 정의(定義)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2012년의 대학에는 어떤 가치가 존중되고 있는가? 대학 커뮤니티에 주로 관심을 끄는 글은 서열놀이, 수능점수가 높은 의대생은 의느님이고, 안성캠퍼스의 학생들은 불가촉천민, 돈셔틀이기에 왕따시킴에 주저하지 않는다. 해교의 혐의를 쓴 운동권 여학생에게 주어지는 집단적 인격살인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그 폭력성은 대구의 청소년을 자살로 내몬 결기와도 닮아 있다. 위계질서에 따라 행동하며 이에 따른 가해는 정당하고 열등감은 체념 혹은 다른 폭력으로 재생산 된다. 이른바 신 봉건주의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러한 경쟁과 냉소에 기반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 속에서 소위 좌파 운동권세력은 자신의 가치를 설파하는데 실패하고 인텔리 좌파놀이에 빠져있거나, 그들만의 혁명적 낙관을 간직한체 사이비 종교동아리처럼 고립되었으며, 그 대안으로서 학생대중들에게 선택받은 세력은 스스로를 ‘무소속’이라 자처한 복지총학생회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2011년 2012년 학생회를 담당한 자들은 직 간접적으로 정치적 지향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위협받는 대학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과정, 효율을 위한 단호한 폐과조치에는 침묵으로—우려를 표시하긴 했다—일관하고, 집권여당의 정치인들을 불러 강연을 하면서도, 실질적 학생 복지의 핵심이며 학생대중의 불만이 분출된 생활관의 기숙사 식권의 끼워팔기, 유효기간에 따른 식권 덤핑현상, 교육의 다양성에 역행할 소지가 있는 교양 강의의 축소 및 질을 담보하지 않은 대형화, 계속되는 수강신청 전쟁 문제 등에는 목소리를 줄였다. 이런 침묵은 학생회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 대중의 위임을 기만하고 자치권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응당 행사해야할 민감한 문제들속에서 권리를 행사할 인식도 의사도 없는 침묵의 의사표시는 학생 권리의 범주를 수축 시키고 궁국에는 소멸로 귀결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이전의 총학생회 간부 몇은 재단계열사에 입사를 했다하니 명분과 실리라는 두마리토끼를 득템한 셈, 다른 대학생들이 부러워할만한 진정한 스펙의 길을 보여주었다.

폐과된 법과대학 학생들은 전공과목의 개설이 줄어드는 것에 대하여, 필수이수학점을 줄이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고 한다. 수업을 들을 권리는 입학시 약속한 학문의 본질적 영역이다. 개설 강의가 줄어든 상황에서 추가 강의 개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수 학점을 줄이는 것은 수업권의 자발적인 포기가 아닌가? 이런 중앙대학교에서 이성적인 학생자치는 어쩌면 불능조건인지도 모르겠다.

권위주의 군사독재시절의 관제야당을 야당으로 평가하지 않고, 사용자와 야합한 노동조합을 어용이라 일컫듯, 말뿐인 복지의 허울을 쓰고 침묵으로 행동하는 학생회를 자치조직이라 부르기는 어렵다는 것이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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