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교양과목 개편, 불편한 현실 이면의 불편한 진실

김성윤 / 중앙대 강사

 

다들 알다시피 교양과목이 개편됐다. 227개 과목 중 25%에 달하는 57개가 없어지고 170개만 남았다 한다. 당연히 말들이 많다. 학교 입장은 이렇다. 강의 시수를 줄여 학사행정을 합리화한다. 대신 강의전담교원을 확충해 교육의 질을 높인다. (나를 포함해) 대다수 입장은 이렇다. 대형 강의가 필요 이상으로 양산되고 교강사와 수강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수업의 질이 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상황이 만만치 않다. 강의실은 콩나물시루 같고, 그 덕에 학생들 날숨으로 이산화탄소가 가득하다. 모르긴 몰라도 좀 있으면 커뮤니티 사이트 ‘중앙인’에 볼멘소리가 올라오지 않을까 싶다. 학교 입장에선 제도 변경으로 인한 당분간의 잡음에 불과하다 여기겠지 싶다. 몇 년을 준비한 개편이라니 아무리 문제가 보이더라도 애써 빼든 칼을 다시 집어넣기도 애매할 테고.

지난 학기였던가. 교양과목 개편안이 알려지자 다른 강사분이 와서 내게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가뜩이나 강의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서 눈치 보며 강의를 맡고 있었는데 강의시수가 줄어든다니, 근심걱정을 늘어놓았다. 비전임교원들로서는 이번 개편이 달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고 (굳이 벌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학생들과 호흡할 기회가 사라지니 아쉬움이 남는다.

강의전담교수들의 사정은 어떨까. 글쓰기를 비롯해 필수 교양과목의 특성상 학생들과의 면대면 지도 내지는 빈번한 피드백이 생명인데, 학생 숫자가 늘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됐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학생들 피드백이란 게 사실 마음먹고 시작하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장난이 아니다. 하다못해 보고서에 논평을 달아 다시 돌려주더라도 해당 시간 동안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할 뿐더러 양적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70~80명이라니. 굳이 노동강도 운운하지 않더라도 교육의 질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교양과목 개편임에도) 주로 전공과목을 가르치는 내 경우도 본의 아니게 영향을 받았다. 전공기초과목은 많게는 100명 가까이 수강하기도 하는데, 대형강의실이 모자라게 되면서 60명 단위 강의실이 배정됐기 때문이다. 강의실이 차버린 상황인지라, 복수전공자나 졸업예정자들의 수강신청 하소연이 빗발쳤다. “교수님, 이거 꼭 들어야 해요.” 한 두 명도 아니고, 그 때문에 이번 학기 초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어디 담당교강사들만 골치가 아플까. 덕분에 각 학과사무실도 수강 여석을 문의하는 학생들로 북새통이었다. 계열별 행정실은 어떨까. 학생들을 콩나물시루에 앉혀야 하는데, 듣기로는 ‘중앙인’에 불편 신고가 올라오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라 한다. 그래서 여석을 허용하는 강의에는 단과대학 행정실에서 학과사무실로, 학과사무실에서 담당교강사들로 일종의 ‘당부’가 전달됐다. 신규 수강생들로 인해 불편함이 호소되지 않도록 기존 수강생들에게 양해와 동의를 미리 얻어달라고 말이다.

 

관료주의적 대학경영의 함정

 

묘사는 이쯤에서 그만. 우리는 이번 소동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개편안에 반대한다 그래놓고 갑자기 배우자 하니 무슨 말인가 싶겠다. 어쨌든 빤해 보이는 소란 속에서도 무언가를 읽어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우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한데, 대학이 기업처럼 운영되고 있다. 이게 어디 어제오늘 일일까 싶지만,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그’ 기업이 창의적이고 착한 기업이 아니라 상당히 관료주의적으로 움직인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알다시피 네트워킹과 커뮤니케이션이 조직의 생명력이어야 할 텐데, 지금의 문제발견과 문제처리 방식에는 구시대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대학본부의 추진력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추진력이 소수 혹은 상당수 구성원들을 배제하면서 발동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문제의식을 가져볼 만하다.

관료주의적 대학경영이 왜 문제라는 얘길까. 주지했듯이, 일은 학교본부에서 벌여 놓고 뒷처리는 일선 행정라인에서 그리고 강의실에서 감당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행정 직원들은 학사 서비스에 문제 지적이라도 있을까봐 전전긍긍해야 하고, 교강사들은 그래도 웃으며 자기 일에 임해야 하며, 학생들은 서로 부대끼면서 눈치를 봐야 한다. 교양과목을 개혁(?)했다는 문화적 이득과 명예는 학교본부가, 그에 대한 부대비용은 서로가 서로에게 전가해야만 하는 번거로운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소동에서 그 무엇보다도 학교구성원들에게 암묵적으로 합의되고 있는 모종의 문제설정을 목도한다. 바로 ‘교육의 질’이라는 문제다. 교육의 질이란 무엇일까. 우리들 중 그 누가 이걸 개념적으로 확정지을 수 있을까. 설령 확정된다 하더라도 이걸 실생활에 적용시킬 수가 있는 걸까. 모호한 문제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개념에 대해 너무나도 특정한 방향으로, 너무나도 강력한 확신을 갖고 있다.

신기하게 학교본부도 교양과목 개편이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목적이라 얘기한 바 있다. 혹자는 이걸 거짓말이라 비난하거나 정부로부터의 등록금 인하 압박을 모면키 위한 ‘꼼수’라고 비아냥거리곤 한다. 그러나 난 학교본부를 믿는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학교에서 무언가 절박하게 얘기할 때는 대개 사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 개편이 교육의 질을 높인다는 확신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꼼수’가 있다면, 등록금 문제보다는 대학평가와 관련이 깊을 듯하다. 강의부담에서 전임 비중이 높으면 좋은 대학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합의하고 있다는 모종의 문제설정이 드러난다. 교양과목이 됐든 전공과목이 됐든, 전임교원은 잘 가르치고 비전임교원은 잘 못 가르칠 것 같다는 의견이다. 그럴듯한 논리 아닌가.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강의평가를 비교해 봐도 아마 대체적으로는 비전임교원보다 전임교원의 점수가 더 높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생각일 터이다. 그렇기에 나와 같은 비전임교원들도 (전임 확충으로 교육 질을 높인다는) 학교의 개편 논리에 암묵적으로 수긍하면서 자신들이 맡고 있던 교양과목을 순순히 내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교육의 질’을 둘러싼 신화

 

물론 불복하는 사람들은 반론을 던진다. 비전임교원들이 사실은 강의를 더 성실히, 그리고 더 알차게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딜레마 하나가 있다. 가령 (우여곡절 끝에) 비전임교원이 강의를 잘한다는 게 증명된다면, 그래서 문제의 해법은 어떻게 하자는 걸까. 뭐, 고민할 게 있나. 대학은 비전임교원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비전임 채용이 교육의 질을 높이니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그게 옳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하면 비정규직 비중은 높아지고 고용의 질이 악화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대다수 비전임교원들의 대항논리는 해법이 될 수 없다. 고용의 질과 교육의 질이 서로 상충한다는 프레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학교본부의 논리가 일견 그럴 듯한 구석도 있다. 본부측은 지금 정규직 비중을 늘려 고용의 질을 개선하는 동시에 ‘교육의 질’을 도모하겠다는 얘기 아닌가 말이다. 물론 대학본부의 개편안이 교육환경과 조직운영의 측면 모두에서 문제를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중시킨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는 배경에는 교육의 질을 수강생들의 만족도로 측정할 수 있다는 모종의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요컨대 개편안을 시행하는 쪽이나 이에 반대하는 쪽 모두에게서 실증주의, 경험주의 인식틀이 중앙대 고유의 집합적 세계관으로 합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질이라는 문제가 만족도나 점수로 계량되는 한, 그 어떤 대항논리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교육, 그것도 고등교육의 방향과 목적이라는 진지한 고민은 뒷전이 되고, 관료주의적 개혁과 철밥통 지키기 사이의 볼썽사나운 소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계량적 평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어도 경험주의의 문제설정을 발견하리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결국엔 누구도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한다는 것은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연출되고 있는 비극을 보면서 그 원리를 캐내고 다음엔 새롭게 희극을 연출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중앙대 구성원들이 체험 중인 불편한 현실 뒤에는, 사실 우리 모두가 공모자라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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