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외부인들

 | 말보루

 제목 없음-5

 

그는 물만 먹고 갔다. 세수까지 하러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옹달샘은 교양학관 일 층에 있는 정수기였다. 강의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를 지나쳐야 했는데, 그의 손에는 늘 1.5리터짜리 물통 두 통이 들려 있었다. 시계를 보면 어김없이 10시 10분 전. 나야 그를 개강하고서야 봤고, 그것도 매주 수요일뿐이었지만 어쩌면 그는 방학 때부터 시작해 다른 요일에도 출근도장을 찍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집에서나 입을 법한 츄리닝에 구겨신은 운동화, 가방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차림새보다 입을 보고서 그가 이 학교 학생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입은 완고한 교수처럼 어떤 질문도 받지 않겠다는 듯 앙다물어져 있었는데, 질문이 귀찮아서라기보다는 두려워서 그런 것 같았다. 누구세요? 라는 질문을 공격처럼 받아들일 처지의 사람.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외부인들’

친구가 한동안 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적이 있었다. 친구네 학교는 학식으로 유명했다. 별다를 건 없는데 싸고 양이 많았다. 근처 학교 사람들이나 동네 주민들도 종종 와서 밥을 먹고 갔단다. 몇백 원 차이 난다고 거기까지 가서 밥을 먹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중위권 정도인 그 학교가 학식으로는 손꼽히니 처음에는 친구도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식당의 자리는 한정돼 있었고, 줄은 길어져만 갔다. 식당은 학교의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앞에 선 이의 등판에서 다른 학교 로고를 발견하며, 그녀는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단 걸 느꼈다고 한다. 그런 생각을 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항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결국 학교 측은 식권 구매시 학생증을 제시하라는 안내문을 붙이기로 했단다. 그 통쾌한 소식을 내게 전하면서 친구는 영화 속 대사를 인용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

내게도 곧 행동해야 할 때가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휴강 공지 문자를 받은 날이었다. 수업 한 시간 전이었다. 이미 남은 길이 돌아갈 길보다 짧은 지점이었다. 세상엔 왜 이리 상식이라는 것이 부족한지 탄식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카드를 찍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삑’ 소리가 났다. 기회가 온 것이다.

정문에 들어서면서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엄지와 검지를 모아, 물통의 입구 둘레를 가늠해 보았다. 아무래도 나뭇잎은 너무 넓었다. 광장에 눈길이 갔다. 잔디밭이 햇살을 받아 초록빛으로 넘실거렸다. 짧지만 꼿꼿하게 서 있는 잔디는 언제봐도 고고했다.

‘미안해. 잔디야.’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잔디를 몇 가닥 뽑았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살다 보면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어김없이 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우리의 등록금이 그의 물통 속으로 새어나가고 있었다.

“저기요.”

그가 쳐다봤다. 정수기 레버에 기대고 있던 물통이 살짝 몸을 세웠다. 나는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에서 물통을 낚아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서 잔디를 꺼냈다. 잔디를 뭉치로 물통 입구에 집어넣었다. 얼굴에 계란을 투척하듯 좀 더 과감한 손길로 하고 싶었는데 잔디가 워낙 가늘어 좀스러워 보이는 게 어쩐지 아쉬웠다. 일을 끝내고 그에게 물병을 건넸다. 그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이제야 부끄러움을 안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수치를 더 깊게 자각할 수 있도록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마른 입술이 떨어졌다. 아주 수줍게, 말이 떨어졌다.

“천천히 마실게요.”

그는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잔디가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리고 그는 떠났다. 답지 않게, 물도 반만 채운 채 말이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생각했다. 석연치 않았던 그의 반응에 대해. 그리고 깨달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제에…’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한 것인지 기가 막혔다. 설마 자기 체할까 봐 걱정이 돼서 잔디를 띄운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걸 띄운 것이라고 믿고 그는 붕 뜬 걸음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그의 몰골이 떠올랐다. 버석거리던 입. 그 빈곤한 입의 풍경이 말하는 것이 그라는 인간의 전부였다. 염치만 없는 줄 알았는데 분수도 모르는 인간이었구나. 애초에 방법이 문제였다. 물통을 엎어버려야 했다. 정신을 차리도록 차가운 물을 얼굴에 부어 버렸어야 했다. 여기가 약수터인 줄 아세요? 라고 쏘아붙였어야 했다. 말 섞기도 싫어서, 잔디처럼 고고한 방식을 선택한 거였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정도 지각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남의 학교에 물 뜨러 오지도 않았겠지. 치욕스러웠다. 어쨌거나 그 인간이 자기 멋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주일조차 기다릴 수가 없어 다음날 다시 그 시간에 그 자리로 갔다. 그는 없었다. 꾹 참고 다음 주 수요일을 기다렸다. 그는 없었다. 혹시나 오는 시간을 바꾼 걸까 싶어 그 다음 주에는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갔다. 그는 오지 않았다. 왜?

‘설마 주제에…’

나를 찬 것인가. 분노에 몸이 떨렸다. 덕분에 나는 강의실 앞에서 지각을 맞이해야 했다. 그를 당장 찾아내어 이 수모를 돌려줘야 했다. 그 일 이후로 온통 그 생각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오늘도 그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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