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서울에서 표류하기

| 아이우에오

 

2007년에 대학 동기를 한 달쯤 자취방에 공짜로 재운 적이 있다. 기숙사에 살았던 동기는 군 휴학을 하고 마땅히 지낼 곳이 없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좁은 내 월셋방에서 함께 지냈다.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때의 결정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엔 내가 그 친구의 자취방에 기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학한 마당에 염치가 없어 자취방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때의 보은을 빌미로 들어가 지난 6개월을 신세졌다. 이 지면을 빌어 친구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학교 당국에도 감사함을 표한다. 민자 기숙사 설립도 내 무임승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신축 기숙사가 지어져, 100만원(신입관자, 2009년, 한 학기 기준)이었던 기숙사 비용이 230만원(2012년, 한 학기 기준)으로 오르지 않았다면, 동기는 기숙사에 눌러앉았을 터이다. 학교의 용단이 내가 살 동기의 반지하방을 만들어주었다. 벌레가 많고, 여름이면 습기에 차 곰팡이가 피는 좁은 자취방이었지만 겨울을 나기엔 좋았다. 보일러가 자주 고장 나서 종종 찬 물로 샤워했던 건 빼고.

그 겨울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취업을 위해 서울에 공부하러 왔단다. 월 45만원, 공용 주방과 화장실, 라면, 밥, 계란이 무료로 제공되는 초호화 고시원에 살았다. 혼자 누우면 가득 차는 궁궐 같은 방에 앉아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 날도 몸소 우리 동네로 왕림해주셨다. 자는 시간에만 침소로 들어서는데, 예민한 심사를 지닌 친구는 옆 방에서 소음이 들리면 쉽게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수면 부족에, 끼니도 부실해 하루하루 옥체가 상하는 기분이 들어, 운동을 하기로 했단다. 팔 굽혀 펴기를 하려고 의자를 밀어 넣고, 책과 짐을 침대 위에 올렸다. 아무리 해도 공간이 부족해 다리를 뻗을 수가 없었다. 팔 굽혀 펴기를 하려고 다리를 굽혔다.

나도 다리를 뻗고 싶었다. 반지하 방 침대는 둘이 자기에 너무 좁았다. 복학도 해야 되고 눈치가 보였다. 기쁜 소식이 들렸다. 토지주택공사에서 대학생에게 전세금을 지원한다는 뉴스였다. 2008년 이후 지방에서 자영업을 하는 우리집은 소득이 크게 줄었다. 나는 토지주택공사 덕분에 2012년 처음으로 아버지의 저소득에 감사해하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평균가구 소득의 50% 이하라는 이유로 지원 대상 1순위에 선정될 수 있었다. 물론 이 영광을 위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쓰여진 페이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소득 증명을 위해 지방에 계신 아버지와 팩스를 수 차례 주고 받고, 통화 중이기 일쑤인 상담원과 이야기 나누기 위해 매일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서류뭉치를 들고 논현동에 위치한 토지주택공사로 향했다. 보통은 한가한 오후의 강남 거리에 이상하게 행인이 많았다. 불길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인산인해, 출근길 2호선 지하철마냥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소득 증명을 위해 번호표를 뽑았다. 대기번호 1513번, 대기인수 273명. 서류 하나 내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9천 가구를 모집하는데, 2만 명이 넘게 왔단다. 발표일에도 별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이 많았나 보다.

서울의 구석방, 전세를 마련하기 위해 부모의 적금을 깨야 하고, 월세를 내기 위해 학생들은 주말 아르바이트를 찾는다. 그나마도 힘들게 구한 자취방이 살만한 곳이 아닌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뭔가 이상한 게 틀림없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방을 구하느라 동네를 누볐다. 운이 좋아 개강하기 전에 간신히, 보증금 400에 월세 35만원의 방을 구했다. 고등학교 동창은 궁궐 같은 고시원을 떠나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방세를 반 씩 내고 함께 살기로 했다. 대학교 동기는 떠나는 나에게 쌀과 스팸, 통조림을 챙겨줬다. 나는 더불어 살 수 있어 행복했다. 콩나물 강의실에서 더불어 배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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