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후기]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개요

김공회 / 국민대 강사

 

다음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을 내 나름대로 개요식으로 간추린 것이다. 특히, 이번 겨울에 내가 했던 두 번의 강의,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가 주최했던 강의와 자유인문캠프에서 마련해준 강의를 수강했던 분들을 생각하면서 썼다. 변변치못한 강사를 잘 따라준 그분들께 감사드린다.

글을 조금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래와 같은 글은,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뭔가 커다란, 매우 인상적인 어떤 영감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 수강생들께서 내게 그런 영감을 주신 셈이다. 이에 대해서도 마음 깊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 자본주의 경제는 다양한 인간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이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자산(property)을 근거로, 그에 비례해 수입을 거두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은 그러한 수입을 얻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활동에 기여하고, 그 대가로 얻는 수입으로 각자의 삶을 유지하는 등 소비활동을 영위한다.

이러한 인간집단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자본가, 임노동자, 지주다. 이들을 ‘계급’(class)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지금과 달리 정치경제학이 막 발달하고 있던 19세기 전반기/중반기엔 정치경제학자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통상적인 범주였다. 이들은 각각 이윤, 임금, 지대를 수입으로 얻고, 이 수입들은 그들이 지닌 자본, 토지, 노동(력)이라는 자산에 비례해 그들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1. 마르크스 당대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이들 수입이 그 자체로 정당하며, 그것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규제되지만 이들 각각을 규제하는 법칙들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의 제1과제는 그러한 법칙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법칙에 의해 각 계급의 수입이 결정되더라도, 그 수입들의 분배가 늘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노동자 가계의 정상적인 재생산을 어렵게 할 정도로 형편없을 수도 있었는데, 이를 방지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몇몇 정치경제학자들은 공동체 전체—이를테면 국가—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허용하고, 나아가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1. 이와 같은 당대의 정치경제학의 가르침에 대해 마르크스는 크게 두 가지 비판을 내놓는다. 첫째, 이윤, 임금, 지대 등은 상이한 법칙들에 의해서 각각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이들의 결정은 서로 내적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둘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 즉 전자가 후자를 착취하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직접적 생산의 영역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즉 노동자가 행하는 잉여노동을 공짜로 가져가고), 이 산업자본가들은 그 착취분을 생산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다른 사회계급들—상품의 보관, 관리 등에 종사하는 상업자본가, 지주, 잉여화폐소유자 등—에게 나눠준다는 것이다. 물론, 첫째, 착취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이뤄질 것이냐, 둘째, 착취된 것이 여러 자본분파들 및 지주계급에게 어떤 비율로 배분될 것이냐 등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법칙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이 법칙을 찾아내고, 그 사회적 의미를 밝혀내는 것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과제다.

  1. 여기서 보듯, 위와 같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또는 정치경제학의 비판적 재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착취라는 개념을 확립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착취 개념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이를 하나로 요약하면,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다시 말해, 상품의 가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고전정치경제학자들이 대부분 밝혀놓았다. 즉 가치의 실체는 인간노동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그 양은 주어진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에 다름 아니다. 마르크스는 다만 이 두 사항을 좀 더 명확하게—이를테면 ‘사회적 평균’, 복잡노동의 단순노동으로의 환원 등과 같은 개념적 도구들을 명시적으로 도입함으로써—규정했을 뿐이다.

  1. 가치 개념의 확립과 관련된 마르크스의 진정한 업적은, 가치란 인간노동이 자본주의 하에서 취하는 특수한 형태임을 밝혔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생산 체계이며, 그 안에서 한 개인은 특정 분야에 속해 특정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행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전체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또한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직접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노동의 산물인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가치란, 바로 이러한 간접적으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노동이 뒤집어쓰는 형식인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화폐형태로 굳어진다.
  2. 자본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화폐에 관한 온갖 환상,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사정과 연관되어 있다. 먼저, 마르크스가 말하는 화폐의 수수께끼 또는 환상이란, “화폐 그 자체에 무슨 대단한 힘이 있어서 그것이 모든 물건의 가치를 표현해준다”라는 생각을 의미한다. 이런 환상은 한편으로는 화폐에 대한 말 그대로의 ‘숭배’를 낳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화폐만 없애면 자본주의를 갈아엎을 수 있다는 그릇된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위 생각은 마르크스에겐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화폐에 무슨 대단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당연히 화폐에 그러한 힘이 부여된 까닭을 살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 그 까닭이란, 자본주의 하에서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노동이 가치—상품가치—로, 그리하여 노동을 매개로 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화폐란 바로 이러한 상품들 중에서 모종의 사회적 과정을 거쳐 선발된 것일 따름이며, 그것이 화폐일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그것이 상품, 즉 인간노동의 체현물이었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노동을 통한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가 맺어지는 방식을 실질적으로 건드리지 않은 채 화폐만 없애려 한다면, (1)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를 없앨 수 없을 것이며, (2) 궁극적으로 화폐가—과거와는 다른 형태를 취하긴 하겠지만—재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우리는 얻을 수 있다.

  1. 대체로 이상과 같은 내용을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표제 아래 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그 순서는 이상에서 설명한 것과 조금은 다르다. 대체로 말해, 정반대다. 그는 먼저 가치라는 개념을 정립한 뒤, 이로부터 화폐를 거쳐 자본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나서 자본의 생산 및 재생산을 생산과 유통이라는 양측면에서 살핀 뒤, 이상의 논의를 경제 전체적인 차원에서, 즉 생산에 직접 관여하진 않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거기 기여하는 사회의 각 분파들을 고려함으로써 풍부화한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작업이 각별한 것은, 그것이 경제의 각 부문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우리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가격현상을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그 자체로서만 파악하곤 하는데, 마르크스는 그것을 생산의 가장 밑바닥과의 연관 속에서, 즉 그러한 밑바닥 매커니즘의 필연적인 현상형태로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가격이라는 개념만으로도 자신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가격의 근거로서의 가치라는 개념을 ‘굳이’ 내세우는 것이다(이렇기 때문에 전자는 가치 개념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러한 불필요성이 제기되는 바로 그 영역과 바로 그 문제틀 안에서 가치 개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바로 그래서다). 거꾸로 말하면, 가치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부르주아 경제학이 제기하지도 못하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며, 무능한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런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현상들을 그저 ‘불가해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리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현상유지적, 현상옹호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은 크게 두 부류다. ‘불가해한 그 무엇’의 존재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쪽과 그것을 개념파악에 실패한 것을 그것의 존재 자체를 무시함으로써 극복하는 쪽. 후자가 통상적인 부르주아 주류경제학이라면, 전자는 비마르크스주의적 비주류경제학—이를테면 포스트케인시언—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진정한 힘은 그것이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바로 그 곳에 있다, 라고. 그리고 바로 ‘그 곳’에 자본주의 경제의 비밀이 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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