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조르바

 | 말보루

 

길을 걷다가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로 했다. 같은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조르바. 나온 지는 꽤 됐지만 여전히 인기 있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이름이 비슷하지만 조르바는 조스바와 다르다. 조스바를 먹으면 혀가 빨개지지만 조르바를 먹으면 볼이 빨개진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우리는 조르바를 핥으며 중얼거렸다.

미국산 소고기가 문제가 됐던 때가 있다. 그 후로 원산지를 확인하고 먹는 것은 시대의 버릇이었다. 조르바의 포장지에는 메이드 인 그리스라고 쓰여 있었다. 왠지 안심하고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철학의 나라에서 온 근거 있는 아저씨군. 내가 말했다. 철학의 땅이어서 그런지 뱀처럼 누비기만 해도 철학적인 몸이 되나 봐. 장구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굴러볼래? 내가 물었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그가 대답 대신 조르바를 핥았다.

우리에게는 부끄러울 일이 아주 많았다. 나는 발보다 손이 빨랐기에 앉아서 글을 썼다. 하지만 책상 위에서만 쓰여진 글은 대체로 지루하고 비루했다. 좋은 글을 위해서는 발로 뛰어야 했다. 하지만 아웃소싱의 시대였기에 나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티브이를 켰다. 9시 뉴스의 타이틀은 발로 뛰는 취재였다. 분업의 효율성을 옆에 두고, 구태여 스스로를 학대할 필요 있나. 나는 티브이 앞에 앉아 소재거리를 기다렸다. 그렇게 계속 가만히 있다 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냉장고로 갔다. 조르바를 하나 꺼냈다. 당신은 어쩔 수 없는 펜대 운전사야. 조르바가 내 입에 들어가기 전에 말했다. 그건 틀린 말이었다. 나는 운전을 못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장구는 동아리에서 운동을 할 줄 알고 들어왔다. 해외 자원봉사를 가고 싶어했던 꽹과리는 ‘우리 문화 홍보’ 항목의 가산점을 얻기 위해 들어왔다. 평소 순진했던 북은 곧이곧대로 음악을 하려고 들어왔다. 나는 징이었는데, 연애를 하려고 들어갔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한 학기 만에 나온 아이들의 모임이었다. 북은 요새 드럼을 치고 있다고 했다. 너는 탑밴드 같은 거 안 나가냐? 꽹과리가 물었다. 안 그래도 1차 예선 통과했다. 북이 답했다. 야, 대단한데? 축하한다. 꽹과리가 말했다. 근데 그거 나가봤자 뭐하냐? 이 말도 꽹과리가 했다. 너는? 장구가 꽹과리에게 물었다. 나 뭐? 꽹과리가 반문했다. 회사 다닐만하냐? 장구가 물었다. 역시 대기업은 다르더라. 꽹과리가 답했다. 계약직이랬나? 북이 물었다. 뱀의 머리보단 용의 꼬리가 나은 거야. 꽹과리가 답했다. 왜? 뱀이 어때서? 난 뱀처럼 사는 게 꿈인데. 내가 말했다. 모두 말없이 소주잔을 꺾었다. 이번에 복학한다고? 북이 장구에게 물었다. 응. 장구가 대답했다. 너 아직도 운동한다고 깝치고 다니냐? 꽹과리가 물었다. 장구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자 잘난 척하기는. 꽹과리가 읊조렸다. 야! 장구가 소주잔을 탁자 위로 내리쳤다. 이 일 없는 워커홀릭아! 장구가 말했다. 뭐, 이 노동 안 하는 노동 운동가야! 꽹과리가 답했다. 나 알바 하거든? 장구가 외쳤다. 나도 회사 다니거든? 꽹과리가 외쳤다. 나도 글 쓰거든? 내가 외쳤다. 북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너 위악 떨지 마. 장구가 꽹과리를 보며 말했다. 넌 위선 떨지 마. 꽹과리가 장구를 보며 말했다. 우리 일어나자. 북이 모두를 보며 말했다.

장구와 나는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둘 다 손에 하나씩 조르바를 들었다. 우리는 너무 말이 많아. 장구가 말했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내가 말했다. 부끄러운 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장구가 말했다. 너는 조르바를 너무 많이 먹어. 내가 말했다. 장구가 나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들려있는 조르바를 봤다. 그래도 핫식스보다는 나아. 장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조르바가 녹으면서 내 손가락 위로 떨어졌다. 장구와 나는 결코 조르바가 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닮고 싶을수록 먹었지만 우린 그저 부끄러움에만 익숙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을 아니까 더 부끄러워지고, 알면서도 그러니까 더 부끄러워지고, 부끄러워지고, 부끄러워지고, 부끄러워지고. 갑자기 윤동주가 떠올랐다. 장구야, 저기 별 좀 봐. 내가 하늘을 가리켰다. 장구는 팔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별 하나에 부끄러움을, 별 하나에 부끄러움을, 별 하나에 부끄러움을, 그렇게 별 헤는 밤을 보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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