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에티켓 위반 사건 여론재판소,‘중앙인’

| 조르바

 

 

“자기가 남을 잡아먹고 싶으면서도, 남에게 잡아먹히기를 겁내며……

다들 의심 깊은 눈으로 서로서로 쳐다보면서”

– 루쉰, ‘광인일기(狂人日記)’ 중에서

 

 

익숙한 풍경. 고3 교실의 야자 시간. 몇몇이 떠든다. 수군대는 소리는 어느새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된다. 반장이 뒤를 돌아보며 “아 공부 하게 조용히 좀 하자고!”라며 한 소리 하거나, 순찰을 돌던 교사의 샤우팅을 듣고 나면 곧 교실은 잠잠해진다.

오늘, 대학의 모습은 고3 교실을 닮았다.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써 노력해 다다른 ‘이곳’이 ‘그곳’과 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자못 씁쓸하다. “취업해야 한다고!”라는 외침 앞에 동아리 행사를 비롯한 다른 활동들은 모두 질식되는, 마치 무균실 같은 곳이 되었다.

소음 문제만이 아니다. 거리 흡연, 잔디밭 출입 등 에티켓을 위반한 경우 이를 여론의 도마에 올려 공격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이다.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중앙인’에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에티켓 위반 사건들이 보고된다. 왜 우리는 사소한 것들에 이토록 민감하게 되었나. 학교는 어쩌다가 이렇게 살벌한 공간이 되었을까. 소음의 끝판 왕, 축제가 끝난 이 시점에 그 의미를 되묻고자 한다.

 

유일한 올바름의 기준, 에티켓

 

우리는 속물이 되기로 했다. 학내와 사회의 여러 부조리에 눈을 감기로 했다. 사회의 갈등과 적대, 그리고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학교 바깥으로 밀어내 왔다. 취직을 준비하며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바쁜 나날 속에서 따라야 할 당위와 가치는 어느새 ‘가식’이라는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다. 홍익대 청소노동자 집회를 두고 내뱉었던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라는 그 대학 총학생회장의 한마디는 개인의 말이기에 앞서 오늘날 대학의 사회적 무의식의 표현이다.

저 당위와 가치가 밀려난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일상에서의 사소한 행위들을 규제하는 ‘에티켓’이다. ‘Estiquier(붙이다)’라는 프랑스 고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이 말은 베르사유 궁전 주위의 화원에 울타리를 쳐놓고 사람들이 화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표시를 붙여 놓은 것이 그 어원이며, 후에 상대방의 ‘마음의 화원’을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쓰였다고 한다. 오늘, 학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대부분은 저 에티켓의 준수 유무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에티켓의 또 다른 어원에 대해선 궁정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궁전 내에서의 예의범절이 수록된 표(ticket)를 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나중에 궁중의 예법이 되어 궁정인이나 각국 대사의 순위를 정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에티켓’도 개념과 무개념을 구분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학내 게시판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를 때는 어떤 집단, 혹은 누군가가 에티켓을 위반했을 때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학교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에티켓 위반 사건 여론재판소’가 되었다.

에티켓은 정작 중요한 문제를 덮어 가리는 역할을 한다. 2010년 학교본부의 일방적인 어문계열 학과 통폐합 구조조정에 항의하며 열린 학생들의 항의집회에 대해서도 “시끄러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학생들을 단지 소음유발자로 몰아갔던 경우도 있었다. 작년 가을 학내 구조조정에 대해 토론해 보자는 취지로 열렸던 ‘200인 원탁회의’도 시험기간에 잔디밭에서 열렸다는 이유로 별다른 소음을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녀사냥을 당했다. 취업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절실했을지도 모를 학내 의사표현의 자유와 가정교육과 폐과를 비롯한 구조조정 문제는 뒤로 밀려났다. 이쯤 되면 ‘에티켓 준수’를 학내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올바름의 기준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왜 직접 말을 못해?

 

물론 에티켓이 단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상대방과 나의 적정거리를 유지하게 해 주는 삶의 기술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그것이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의 근거가 될 때 문제가 된다.

우리에게는 에티켓 위반 사건을 ‘중앙인’에 성실히 알리는 ‘논란의 배달부’들이 있다. 연예인의 일탈을 보도하는 스포츠 신문의 기자들처럼, 이들은 사건과 중앙대 학우들을 매개해서 학우들이 이들을 공격할 수 있게 ‘떡밥’을 ‘투척’하는 역할을 한다.

이상한 것은, 이들은 불쾌감을 겪은 그 자리에서는 묵묵히 참고서 그 뒤 키보드나 핸드폰을 꾹꾹 눌러 온라인 커뮤니티에 슬며시 보고한다는 점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정중하게 직접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일 텐데 말이다. 이들이 무슨 연유로 그리하는지, 타인을 밀고하는 옹졸한 쾌감 때문인지, 불타는 의협심의 발로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공론의 재판에 올리지 않으면, 타인이 내게 주는 불편함과 불쾌감에 대해 말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게시판에 사건과 가해자(?)의 신상을 올려 여론의 공격을 유도하는 편하고 안전한 선택을 할 뿐, 불쾌감을 직접 표현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해소될 타이밍을 놓친 불쾌감은 쌓일수록 한번 말하면 풀릴 ‘짜증’에서 후려쳐야 속이 시원할 ‘증오’로 변하게 마련이다. 가득히 쌓인 증오는 게시판을 통해 과잉 표출된다. 정말, 총장님 말마따나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지경이다.

 

여론재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가해자를 색출하고 그를 공격하려는 열정 앞에서 문제의 또 다른 원인은 쉽게 잊힌다. 우리가 소음과 타인의 담배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타인과 나의 거리, 행사와 수업의 거리가 지나치게 좁기 때문이다. 곧, 공간의 문제다. 현재 학내에서 소음을 내지 않고서 야외 행사를 할 수 있는 장소가 과연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더군다나 곧 대운동장에도 건물이 신축된다고 하니 점점 학생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수업권과 학내에서의 활동이 충돌하게 되는 조건에는 침묵하면서, 단지 개인들만을 문제삼고 이를 증오의 표적으로 제시하는 일은 갈등의 해소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옹졸하게 욕을 하는” 우리는 얼마큼 작은가. 옹졸한 중앙대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우리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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