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실망과 피로는 오늘까지만

ㅡ 인문대 학생총회 무산 사태를 바라보며

 

실망감과 피로감만이 남았다. 하지만 이것이 ‘구조조정을 둘러싼 싸움의 포기’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실망과 피로는 오늘까지만 품길 바란다.

1.
인문대 학생총회가 무산됐다. 오후 6시 20분 정족수를 넘겨 개회하는 데 성공했고, 학사구조 선진화 계획에 대한 인문대 학우들의 입장을 묻는 의결과정까지 마쳤다. 여기까지 마치는 데 20분이 걸렸다. 비밀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거수투표 방식의 채택, 그리고 무엇보다 회원 명부를 확인하지 않고 참가자들의 머릿수만 세어 회의장에 입장시킨 탓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 의결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회칙으로 명시된 인문대 학생회원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큰 문제가 된다.

의결이 끝난 직후 몇몇 학우들이 회의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제기가 인정돼 다시 처음부터 온당한 절차를 밟았으나 이미 의결을 끝낸 많은 학우들이 회의장을 떠난 직후였다. 총회는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무산됐다.

문제제기는 정당했다. 의결이 이뤄지기 전에 제기됐으면 더욱 좋았을 법 했으나, 늦게나마 제기된 것이 다행이었다. 심각한 절차적 문제를 지닌 구조조정에 대해 의결하는 과정이 절차적 문제를 지니는 것은 모순적이다. 다행히도 총회를 주관한 인문대운영위원회는 의결이 끝났다는 이유로 이 문제제기를 묵살하지 않았고, 각급 학생회장들이 학우들 앞에 고개 숙여 사과함으로써 최소한의 자정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2.
오늘과 같은 사태가 왜 발생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민주적 회의 절차를 경험해보지 못해 생긴 무지가 원인일 수도 있고, 회의 진행의 ‘효율성’을 위해 절차마저 효율적으로 무시해버린 탓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는 이후 인문대운영위원회의 사과문을 확인해야겠으나, 무엇이 원인이었든 문제의 크기는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앞의 것이 원인이라면 민주주의 일반 원칙에 대한 치열한 학습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정도가 다를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사고의 틀 자체를 바꿔야 하는 문제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오늘 발생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의장인 인문대 부학생회장은 회칙상 ‘부칙’을 근거로 반박했다. 부칙의 내용은ㅡ인문대 학생회칙을 지금 당장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ㅡ 회칙에 명시돼 있지 않거나 해석이 필요한 내용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권해석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치열하게 토론해서 활용돼야 마땅하다. 유권해석이 별 다른 고민 없이 남용됐을 때 학우들이 느끼는 감정은 ‘운영위원회의 독재’에 가깝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경우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명시해두지 않은 부실한 회칙이 문제다. 부실한 회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학생대표자들이 오늘 잘 확인했길 바란다. 앞으로 인문대 학생회는 이 회칙을 정교하고 민주적으로 개정해나가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또한 회칙을 일반 학우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온라인 공간에 비치해두는 노력 또한 당연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체카톡방이나 페이스북 그룹 같은 임시 공간이 아닌, 포털 카페 또는 블로그 공간의 마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타 단과대도 마찬가지며, 각급 과 학생회 또한 해당된다.

오늘 사태를 전적으로 운영위원회의 문제라고 말하면 운영위원회로서는 다소 억울할 것이다. 잠망경이 취재를 위해 회의장을 돌아다니면서 접한 웅성거림 중 일부는 이미 의결된 것을 왜 다시 문제제기 하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문제제기 한 학우들을 ‘구조조정에 찬성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웅성거림도 일부 있었다. 민주적 절차보다 효율적 결정을 우위에 두는 것은 비단 운영위원회뿐만이 아닌 것이다. 폐회선언이 있기도 전에 의결이 끝나자마자 뒤돌아보지 않고 회의장을 퇴장한 학우들도 상당히 많았다. 의결을 위한 수동적 거수기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이와 같은 일상적인 수동성이 이번 사태에 일조했다고 말하는 데는 논리적 무리가 없다.

3.
경과가 어찌 되었든 현재까지 있었던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움직임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움직임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산됐다. 적어도 구조조정 절차가 일단락되는 다음 주까지는 총회를 다시 개최하기 힘들어 보인다. 오늘 모였다가 실망감과 피로감만 남긴 채 집에 간 학우들의 실망감과 피로감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지 인문대 학생총회가 어그러졌을 뿐이다. 인문대 학생회만이 유일한 싸움의 주체는 아니다. 우리의 실망은 학생회로 향하되, 싸우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향해선 안 된다. 우리의 실망이 구조조정을 둘러싼 싸움을 향하는 것은 인과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A에 대한 실망이 B에 대한 포기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의 주인인 학생이다. 우리는 구조조정 계획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인문대 학생회가 우리를 충분히 잘 대변해주지 못했다면 우리가 직접 나서면 될 일인 것이다. 학생 공대위 서포터즈가 있고, 소속 없이 자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대운영위원회는 오늘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앞으로 오늘 사태에 대해 충분히 반성하고 사과하고 더 나은 대응책을 내놓기를 바란다. 총회가 아니더라도 학우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획들을 내놓기를 바란다. 오늘의 실망과 피로는 오늘까지만 간직하자.

4.
오늘이 지나도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나오미 울프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리가 싸우고 저항하는 과정은 그 싸움과 저항을 통해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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