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소리쳐야, 그나마 알아주는구나.        

| 연두부

 

자신이 없다. 너무도 쉽게 말소돼버리는 분노가, 피로감이란 말로 대체돼버리는 슬픔이 두렵다. 지금도 손을 뻗고 도움을 청하는 울먹임들을 나는 어느덧 하나의 노랫말처럼, 그때 그 순간이 담겨진 절망과 공포를 ‘힘드시죠‘ 하는 얄팍한 동정과 책임감으로, ‘표면적’으로 소화시키고 있다.

물론 약간의 진전은 있다. 작년 5월의 나는 세월호가 일상과는 동떨어진 일인 양 생각했다. 당시 ‘세월호는 교통사고다’라고 말하는 자들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고 해서인지는 몰라도 참담한 비극에 대한 공감이 적었던 것 같다. 밥을 먹으면서, 여느 뉴스거리를 보고 1-2분 가량을 떠들 듯 소비했다. 공감이 적으니 지극히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나열했고 세월호 사건을 기점으로 바뀔(가령 정치적 태도 변화 등) 사회/집단에 대해 아주 낙관적으로 기대하기만 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갓 대학을 입학한 나는 놀고 싶었고, 구조적 문제는 내 손 밖에 있는 커다란 일이니까- 하고 의식적으로 말하기를 멈췄다.

우습게도 그랬다. 동시에 당사자 문제로 놓여서는 안될 많은 것들을 쉽게 그 자리에 놓고, 떠나버렸다. 그냥 ‘엿 같이 무능한 정부!’하고 지껄이곤 그래도 ‘노란 리본 달기 운동, go발 뉴스, 팩트 tv와 같은 매체가 등장하니까’ 하고 안도하고 안일했다. 그렇게 잊어갔다. 몇몇 역겨운 사람들의 세월호 정치 타령, 입신양명을 위해 자식까지 팔아먹는다는 둥의 발언에 짜증나기 싫어서 어느덧 나는 세월호 관련 기사를 클릭하지 않았다.

그러다 방학이 왔고, 1주기가 왔다. 나는 학교 다니는 걸 좋아해서 방학 때도 자유인문캠프에서 주최하는 강연을 듣곤 했다. 그게 연이 닿은 건지는 몰라도 자유인문캠프를 하는 사람이 함께 이번 집회에 참가해보자 하기에 무작정 길을 나서봤다. 추모 시위라고 했다. 사실 시위는 처음이라, 가기 전부터 ‘잡혀가면 어쩌지’ ‘뭐 맞으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미 떠난 발걸음을 돌리기 애매했고 미안해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청역이었고 노란 리본을 곳곳에 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나는 일년 전과 유사한 안도감을 느낌과 동시에 또한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의해 벅차 올랐다. 잊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에 감사했고 추모의 물결 위에 여러 단체의 깃이 휘날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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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추모제가 진행됐다. 못다 핀 꽃들의 찬란함을 기리는 영상들이 끝나고 유가족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한 유가족 어머니는 여당 대표인 김무성이 오니까 안산에 비가 왔고 놀랍게도 가자마자 하늘이 맑게 개었다고, 아이들의 억울함에 하늘도 동한 것이라는 맥락으로 연극하듯이 말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감당키 힘든 억울함과 분노를 날씨, 즉 하늘이 대변해준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표현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발언 때문에 과도하게 감성적으로 호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하면서 지지를 얻어야 하나 싶었다.

게다가 ‘시행령을 폐지하라’까지는 이해되는데 ‘박근혜는 퇴진하라’라는 구호를 들었을 때, 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충분히 호소력 짙은 아픔이기에 광범위한 사람의 동의 하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많을 텐데, 너무 급진적인 요구를 내놓아서 세월호 사안에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등지게 하는 것 같았다. 찝찝함은 비 때문에 앞코가 다 젖은 신발 덕에 배가 되었다. 그래도 이르게 져버린 소망들을 위로하고자 광화문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큼 도로가 한산했다. 아무리 평화적으로 걷는 시위라지만 원래 차가 하나도 없는걸까 하는 의문과 조용하니 좋다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시민들이 점거하는 도로라니! 묘하게 멋있었다. 한 십 여분을 걸었을까, 높은 벽이 보였다. 거기엔 POLICE라는 알파벳이 적혀있었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불법’시위이니 즉시 해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부터 좀 화가 났던 것 같다. 공식적/제도적 발화가 불가능한 일반인이 엄청난 비극을 당했고, 절규한다. 아프다고, 다쳤으니 고쳐달라고 ‘조곤조곤’ 신음하는데 ‘조용히’ 하라니. 나는 마음이 아픈데 두통약을 줘놓고 그걸로 퉁치라니. 잘못된 처방을 해놓고 심지어는 그 책임을 일정부분 져야 할 공식적/제도적 기관이 너네 왜 시끄럽게 하냐는 식으로 쳐다보는 그 눈초리가 너무도 싸늘했음을 느꼈다. 광화문으로 가는 대부분의 길목이 막혀 세시간 내내 걷고 걸었다. 경찰 벽으로 인해 고립된 시위자와 시민들 간의 물리적 단절ㅡ그 불합리함의 극치ㅡ 덕분에 새로운 세계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혹은 무덤 속에 묻힌 것 같기도. 그리고 확신했다. 현정부는 진상규명 의지가 없구나. 그래서 그들은 ‘큰’ 소리로 신음하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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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쳐야, 그나마 알아주는구나. 내적 붕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켜질 것이라 믿었던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이곳에서, 누가 과연 소수자가 아닐 수 있을까. 도대체 정치적이지 않은 사적인 것이 어디 있는지, 사적 존재로의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왜 우리는 닫힌 문 밖에서 그들을 관망하는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나는 생존자이자 위험에 노출된 사람이다. 물이 차오르고, 거대한 파도는 우리를 삼키려 한다. 바다 속 암흑에 숨이 찬다.

허나 나는, 우리는 잠식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추모 집회 이후에 한 것이라곤 추모 리본 뱃지를 사는 것, 대나무 숲 글에 알량한 분노의 댓글을 다는 것, 세월호 관련 보도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밖에 없었지만 내가 감당할 범위를 넓혀가고자 한다. 각인된 아픔을, 혹은 아픔을 각인시켜 소화하지 않으려 한다. 만성적인 소화불량이 음식을 더 꼭꼭 씹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단 하루의 시위는 많은 혼란을 내게 쏟아냈다. 그곳은 살아있는 무덤이었다. 죽은 자들이 머물러야 하는 곳에 죽지 못해 산 자들이 산다. 고립되고, 숨통이 조이면서도 그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확실한 건 부유하는 의문 속에서 답을 건져내야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의 세계는 성숙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말하고자 한다.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야지. 다 들릴 수밖에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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