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소한 호통에는 대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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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윤

수능이 며칠 안 남았을 때, 야자 때마다 창밖만 빤히 바라보곤 했다. 검은 바다 위에 뜬 몇 척의 배와 그 사이로 깜빡이는 크레인 불빛, 이 동네를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 오래 고민했던 것 같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목적은 학생을 대학에 보내는 것. 억지로 진로 상담지를 채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종이가 찢어져 아예 새로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동네에는 변변찮은 문창과도, 아니 대학도 없었으니까. 결국 악착같이 서울로 올라와서 여전히 글을 썼다.

이런 나를 아는 친구가 어느 날 기사 하나를 보여주었다. ‘황석영, 한국 문학이 이렇게 된 건 문예창작과 때문’, 자극적인 헤드라인이었다. 자세히 읽어 보니 문학 강연 중, 신경숙 표절사태 이후의 한국문학에 대해 질문한 기자에게 그가 기삿거리를 던져 준 모양이었다. 한국문학을 문창과가 주도하면서 소설에는 서사도 철학도 없이 기술만 남았고, 그래서 신춘문예 심사는 재미도 없어 그만뒀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자극적인 멘트만 남기는 기자의 작품일 수도 있어 그냥 넘길까 하다가, 그날 유독 책이 안 잡혀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됐다. 한국문학의 독자이자 습작생으로서 지나칠 수 없었다.

옛날엔 어떤 학과든 대학만 가면 성공한 거였다던데 요즘은 뭘 해도 필수조건으로 대학, 이왕이면 명문대를 가라고 한다. 황석영은 장정일을 언급하며 중졸도 작가가 된다고 했지만, 지금 태어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문예창작과에 가지 않아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건 대부분의 습작생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에 꼭 가야 하니까, 문예창작과에 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분위기란 것은 진로와 조금이라도 동떨어져 보이는 선택으로 담임은 물론 자기 자신도 설득할 수 없게 만드니까.

황석영은 1943년에 태어나 남북전쟁, 군부독재, 민주화에서 현재까지를 온몸으로 겪었다. 불안정한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에게 예측 불가능한 의미로서의 ‘자유로움’을 준다. 그의 소설이 넓은 스펙트럼과 인상적인 서사로 막막한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것도 이런 시기를 살아낸 경험 덕분일 것이다. 그걸 잘 보여주는 『개밥바라기별』은 지금도 명작으로 꼽히지 않는가. 허나 그런 황석영이라도 삶이 정형화된 세대가 쓴 문학에 대고 경험 부족을 운운할 수는 없는 거다. 같은 맥락으로 대학, 문창과, 크게 보아 예술계 학과에 가지 않는다고 이 경험과 체험이 더 확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 세대는 ‘제2의 개밥바라기별’을 쓰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지금 세대는 또 다른 제1의 무엇을 쓰고 있다.

제1의 무엇이 뭘까. 최근 소설들이 잔잔하고 서사가 얕은 점은 사실이다. 황석영은 최근 신춘문예 작품 수준을 얘기하며 투고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여성작가의 작품은 전쟁이나 이념 갈등의 거대담론 서사 바깥에서 소외되어 왔던 인물들을 내세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사가 약해 보이는 것이다. 또 젊은작가상으로 주목을 받은 신인 정지돈, 박솔뫼를 포함한 ‘후장사실주의자’들은 아예 ‘서사도단’을 들고 나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흐름들을 봤을 때, 최근의 작가들은 더 충실하게 세계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다. 그것이 전 세대와 다른 방식일 뿐.

굵직한 서사가 불필요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작가 공채시험, 한국의 신춘문예다. 황석영이 심사가 재미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게, 신춘문예는 여전히 단편 위주로 공모를 받는다. 단편 서사의 경향은 앞서 말한 대로 변해가고 있고, 굵직한 서사를 가진 작가를 원한다면 장편 공모가 있어야 한다. 신춘문예뿐 아니라 모든 시험 대비의 기본은 기출문제 분석과 모범답안 작성이다. ‘뽑힐 작품’을 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응모자가 시험에 대해 불평해봤자 그건 변명이 된다. 심사위원이었던 황석영은 투고작의 수준 이전에 어떤 작품이 뽑히고 있는지를 지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철학이 있는 작품을 뽑기 시작하면 다들 철학을 갖기 위해 안달이 나게 될 것이다. 사실 창작부터 문예이론까지 다 배우는 학생들에게 철학이 없다는 것도 의문이지만.

물론 다른 투고 방식도 있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독자와 문인의 시선에서 신춘문예의 권위가 막강하다는 게 문제다. 어떤 출판사들의 장편공모를 통해서, 혹은 주요 일간지가 아닌 다른 경로로 등단(아니, 권위자들의 표현으로는 ‘출판’)한 작가들이 서사와 세계관을 포함해 뛰어난 작품성을 평가받고 활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장강명, 배명훈, 천명관, 손아람, 박민규 같은 작가들. 이들 중엔 문창과를 비판하는 사람도, 문창과 출신인 사람도 있다. 이들처럼 되라는 말은 쉽겠지만 이 작가들은 전부 기형적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기자 출신이며 PC통신에서 소설을 쓴 장강명, 환상문학 웹진에서 활동한 배명훈, 출판사 장편공모로 데뷔한 박민규와 천명관, 주요 출판사 바깥에서 데뷔해 영화화를 이뤄낸 손아람, 전부 신춘문예 출신은 아니다. 아주 이례적으로, 주요 출판사가 이런 작가들의 책을 언제 내주냐면, ‘잘 팔릴 것 같을 때’다. 출판사 문학상도 그 때문에 있는 거다.

PC통신 발달 이후 신춘문예가 아닌 다른 경로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출판계의 ‘간택’으로 주류에 편입할 수 있었다. 천명관과 손아람이 문단과 문창과를 비판하는 부분은 이 지점을 지나간다. 공교롭게도 여태껏 장르문학이니 순수문학이니 논쟁하며 선 긋고 문단의 고결성을 유지한 게 신춘문예와 출판계의 권위자들이다. 정공법의 문창과 학생과, 배척당한 언더그라운드 습작생, 이들은 시스템에 휘둘리는 존재지 시스템을 지배하는 자들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과 같은 케이스만 발굴하면 한국 소설의 대안이 등장할 것 같기도 한데, 이 대안처럼 보이는 ‘발굴’이 정확하게 근본적인 문제점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한국 명단편 101선집을 기획할 정도로 꼼꼼하게 문학 동향을 살펴본 황석영이 이런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문학의 문제? 여기 ‘문학예술’이 있다고 치자. 신춘문예가 ‘예술’의 고결성만을 추구할 때 출판사들은 그에 동참하는 척하며 잘 팔릴 ‘문학’작품을 슬쩍 빼내 출판했고, 대중들은 예쁘게 홍보되는 작품만을 읽기 시작한 것, 이게 문제다.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그 사이 ‘문학예술창작과’ 학생들과 습작생들은 이 현실을 알면서도 저항할 수 없어 기술 즉, 예술을 연마한 거고. 차라리 문창과를 지목하더라도 그 구조를 악용해 문창과 속 포진하는 주요 출판사와 그 권력자들을 지목한 것이었다면.

아래로 내리꽂는 호통과 고개를 들어 위로 외치는 일갈은 그 무게가 다르다. 그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이는 얼마나 사소한 호통인가. 오늘도 아등바등 살기 위해 분투중인 청년들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어른들에게 ‘우리 때와 다르게 노력이 부족하다’ 따위의 소리를 듣게 되는 건 문학계도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한국 문학에 대한 그의 문학관과 애정에는 공감한다. 그렇기에 더욱 황석영, 그리고 기성문인들이 더 큰 그림을 향해 비판해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단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이야기는 사실 당신을 위한 알레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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