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주변에서 중심으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목소리를, ‘어떻게’ 내야할지 알게 한다는 것이다.

 

| 아델

 

여느 때보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게 했던 한 해였다. IS, 옹달샘, 분칠, 쇼미더머니, 여성혐오와 같은 키워드가 뜨는 과정에서 여성주의 도서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굿즈샵(?) 알라딘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상품을 만들었다. 다섯 명쯤 예상했던 여성주의 세미나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 ‘언제나 위기인’ 학내 여성주의에서 다시없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학회 <여백>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신기하게도 ‘나의 여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나’라는 사람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말조심해야 하는 애’, ‘예민한 애’가 된 계기는 가족에 대한 최초의 기억부터 고등학교 때 은근슬쩍 어깨를 주무르던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내가 처음 감각한 ‘여성’은 나 자신에 앞서 ‘엄마’라는 존재였다. 7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나의 엄마는 좋은 학교의 좋은 학과를 졸업해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금도 엄마는 그 때를 ‘참 좋았다’고 회상하곤 한다. 참 좋았던 어느 날, 그녀는 결혼이라는 평범한 선택을 했다. 그래, 평범한 엄마였다. 빵집 알바, 파출부, 장애인 활동 보조를 비롯한 온갖 일을 다 해야 했던, 그래도 배추값을 모른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한바탕 핀잔을 들어야 했던.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 돌아오고서도 다시 컴퓨터 화면에 워크넷과 가계부를 띄우던. 나는 그런 엄마를 ‘엄마’라기보다는 같은 여성으로서 갖는 안타까움, 내지는 딸로서의 죄책감으로 바라보곤 했다. 어쩌면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일말의 연민이었을 수도 있다.

또 ‘강남 8학군’을 나온 나는 성별보다는 계급과 가족, 지역 정체성을 더 크게 실감하고 있었다. 친구들과는 다른 삶의 경험들과 다른 고민들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그 안에 어울려 속해있다는 것. 그 아이러니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비록 남자 애인에게서나, 동기 자취방에서 좋지 않은 경험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때 나는 여성주의를 처음 만났다. 많이들 경험하듯 여성주의의 언어들은 이제껏 내가 쌓아온 세계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보다 크게 가졌던 첫 인상은 ‘위로’였다. 누구에게나 소수자성이 있다는 말, 어쩌면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나에게는 여성주의라는 인식론이 마치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어떠한 종류로든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략) 하지만 이렇게 정상의 ‘자격’을 좁혀가다 보면 실제로 ‘정상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얼마나 있는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32p.)

저마다에게 여성주의는 다른 의미로 존재한다.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죄책감’이자 누군가에게는 ‘논리’가 된다. 한편 여성주의는 공감의 장이기도 하다. 이성애-중산층-남성 ‘주변의’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이면 더 큰 의미를 만들어낸다. “오빠 제가 살게요”, “제가 고기 구울게요”를 외치다가 문득 내가 ‘개념녀 되기’에 정진 중인가 싶다면, 제모를 하다가 어느 순간 ‘현타’가 온다면, 남친 있냐는 말에 “아뇨, 남친‘은’ 없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럼 ‘남편이’ 있냐고 묻는다면, ‘게이샷’, ‘레즈샷’을 외치는 학과 술자리가 불편하다면(모두 필자의 사례), 어서 오세요, 여백으로.

이 ‘청정구역’을 벗어나면 또 어떻게 살아야할지, 졸업을 앞둔 개복치로서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목소리를, ‘어떻게’ 내야할지 알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백>은 한 학기 세미나를 마무리하고 겨우내 공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함께 ‘여백’을 넓히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연락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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