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을 읽고] 대학은 대학생이 잘 안다?

| 압생

 

‘대학은 대학생이 잘 안다’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를 가질까? 나는 지난 2월부터 ‘20대가 쓰는 20대 언론’을 표방한 곳에서 기사를 쓰고 있다. 저 한 줄의 수사에 몇 가지 단상이 스친다. ‘20대가 쓰는 20대 언론’이 정말 20대에 대해서 더 잘 말할 수 있을까? 어찌되었건 그곳은 ‘독립’언론이니까. 돈을 벌지 않으니까. ‘무급’이 ‘유급’될 때 생기는 마음가짐 따위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생계활동과 병행하기 때문에 오는 ‘시간’과 ‘에너지’의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20대로서 경험하는 것들의 층위는 얼마나 제한적인가.

이 당사자성 앞에서 가끔은 무력함을 느낀다. 정말 나는 20대의 일부만을 감각하며 살고 있으며, 그 일부에 해당되는 ‘대학생’, ‘이성애자 남자’ , ‘서울시민’조차 완전히 감각치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가 쓰는 20대 언론’이라는 수사를 놓을 수는 없다. ‘20대’의 취약성 때문인데, 우리는 여전히 세대담론을 주도치 못하며, 스스로 해석하기보다는 해석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대학은 대학생이 잘 안다’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를 가질까? 중앙대학교에서 중앙대생은?

‘구조조정’, ‘글로벌’, ‘기업화’라는 단어들이 교정 안으로 들어왔고, 지금은 너무도 익숙해져버렸다. 이런 대학에서는 학생이 그 구조를 감각할 여유도, 하다못해 ‘학교란 무엇일까’를 고민해 봐야겠다는 동기가 생길 기회조차도 존재치 않아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박용성이 사퇴했다’, ‘징역을 확정 받았다’는 기사를 읽고, 개인의 도덕성을 책망하며 혀를 차는 것뿐이 아닐까. 지난 칠년간 지속되었던 ‘박용성 시대’에 대한 체감은 부재한 상태로 말이다.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구조조정’, ‘기업화’에 대한 감각은 저 저열한 ‘박용성’ 개인을 둘러싼 논쟁 앞에서 생략되기 쉽다. 이 지점에서 잠망경 제12호는 ‘박용성’이라는 표상 뒤에 생략된 구조에 대한 감각을 돕는다. 6~8면을 통해 ‘기업화’ 매커니즘을 자본 구조 아래의 개념들과 병치하여 잘 설명해줬다. 재단이 학생취업을 담당하는 자리에 ‘노조파괴의 달인’을, 행정적 지위도 애매한 미래전략실장 보직에 ‘구조조정 전문가’를 채용했다는 보도가 그렇다.

더불어 신임 김철수 이사장의 세종대 총장 재임 시절 ‘교비 부당집행에 의한 징계전력’을 짚으며 박용성 시대와의 연속성을 암시했다. 박용성의 추락이 곧 ‘기업화의 추락’으로 읽힐 수는 없는 것이다. 박용성 사태는 부도덕한 권위자에 대한 통쾌함이 아닌, ‘신자유주의 대학’의 저열함으로 감각되어야 한다.

매 학기 잠망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당사자성’의 함정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줬다. 독자에게는 체감 불가능했던 ‘구조’를 감각의 영역으로 끌어내렸고, ‘잠수함토끼들’은 그들의 당사자성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학우들을 공감하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모습을 보여줘 왔다. 여전히 ‘학생’이라는 지위가 학내외에서 해석되고 의미지어지고 규정되는 상황이지만, 그 의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대학생으로서 가지는 당사자성이 고갈되어버린 상황에 잠망경은 이것을 우리의 문제로 체감케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가 둔감에서 벗어날 때, 그동안 각자의 이권에 맞추어 학생을 해석해 왔던 이들은 긴장하게 될 것이다. ‘대학은 대학생이 잘 안다’는 문장 뒤에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가 붙을 수 있도록. 당사자성에 잔존하는 차이들을 꿰어 연대하고, 주변화된 ‘학생’이 주체의 층위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번 학기에도 발행될 잠망경에 응원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 부끄러움을 담아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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