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그래, 나 담배피는 여자다

당신과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결국 당신 역시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담배를 피우게 생긴 얼굴을 가진 여자’와 ‘담배를 피우지 않게 생긴 얼굴을 가진 여자’를 구분할 자격 같은 것은 당신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앨리스

| 앨리스

지난 해 나는 오래도록 사귀었던 연인과 헤어졌다. 헤어짐의 이유는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니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일로 인해 내 인생이 급격히 우울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끼어드는 엄마의 잔소리와 취업준비생이라는 이름의 무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아져, 가만히 앉아 커피 한 잔을 비우고 나면 할 이야기가 없어 어쩔 줄 모르게 되어버렸다. 아무리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하고 말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그런 세계에 살고 있자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나 자신을 위로하는 데에는 여전히 서툴러서 결국은 매일같이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술이 주는 고유한 들뜸으로 가득한 자리에서도 나는 사실 한없이 우울했다. 그러니 집에 돌아와 거울을 바라볼 때면 우는 듯 웃는 듯 기묘한 표정을 마주할 수밖에. 어느 소설가는 그런 표정을 “이따위 빌어먹을 우주에서나 살아가야만 하는 불쌍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그런 얼굴”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뭐 어쨌거나 그런 이유들로 인해 나는 흡연자가 되었다. 지인의 권유로 시작했던 몇 개비는 이내 습관으로 굳어졌다. 사실 큰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연기가 자욱한 세계니까. 수천 개의 공장에서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뭉게구름과, 수백만 대의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 수십억 명의 사람들 입에서 떨어져 나온 한숨, 같은 것들이 뒤섞여 하루하루 대기를 뒤덮어간다. 그러니 거기에 한두 모금의 연기가 더해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하고 그 때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나 보다. 종종 그들은 마치 내가 갑자기 달에서 건너온 외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집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면, 하루에도 수번의 흘깃거림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묘한 호기심과 경멸의 감정을 받았다. “안 그렇게 생기셨는데, 담배를 피우신다니까 좀 그러네요.”라는 말을 듣고도 분위기 깨지 말라는 야유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전화한 과 선배는 내게 안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너, 혹시 담배 피냐?”라고 물었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 허허 웃으며 넘겨 들으려는데, “야,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라는 말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내게 조언을 해준 그는, 흡연자가 된 지 어언 10여년은 지난 사람이었다. 그 쯤 되자 나 역시도 내가 달에서 건너온 외계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커진 중력에 저항할 수 없어,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고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은 아닐까- 하고. 차라리 소행성 B612호에서 온 작은 소년처럼 사막에 떨어졌으면 나았을까? 어느 래퍼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기 참 빡세다는 생각”을, 그래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흡연여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성은 늘 주체성을 잃은 대상으로 그려져 왔고, 현재에도 그렇다. 회사에서는 ‘커피 타고 카피 하고’를 반복하고, 남성 앞에서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야 하며,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밝힐 때면 ‘깬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 삶. 때때로 그런 삶에 마냥 수긍하는 것이 어려워 “왜 여성은 이래야만 해요?”하고 질문을 던지면, 으레 돌아오는 것은 침묵 속의 따가운 눈총일 뿐이다. 그 수많은 무게감에 짓눌려 결국에는 입을 다물고, 내 자신의 문제인 거라 스스로를 탓했다. 지배적 시선에 맞춰 살아가기를 강요당하는 와중에, 우리의 정체성은 노을 지는 풍경마냥 서서히 옅어져 결국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과연 개인의 문제일까. 우리의 존재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런 거다. 이 세계에는 대략 80억 명의 인간이 살고 있다. 80억, 참으로 까마득한 숫자다. 그 중에는 엄마의 립스틱을 손에 들고서 거울을 바라보는 소년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건 담배를 피우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신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당신과 같지 않다고 해서, 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해서 감히 혐오의 시선을 던지지 말라. 당신이 운이 좋아 세계에 부합하는 존재로 살아왔다고 해서, 타자를 비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어쩌면 혹자는 억울해 할 수도 있겠다. 속으로 ‘나는 남성이지만 여성을 존중해. 담배 피는 여자도 상관없고.’하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그 말 뒤에 ‘그렇지만 내 여자친구는 안 돼.’와 같은 말이 내뱉어지지 못한 채 삼켜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성적으로는 ‘양성평등’을 주창하면서도, 사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가 처한 입장과 그 우위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얼마 전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안 그렇게 생기셨는데, 담배를 피우신다니까 좀 그러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때는 미처 말하지 못했으나, 당신과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결국 당신 역시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담배를 피우게 생긴 얼굴을 가진 여자’와 ‘담배를 피우지 않게 생긴 얼굴을 가진 여자’를 구분할 자격 같은 것은 당신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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