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어떤 남성 페미니스트

‘너는 가해자가 아니다’며 전 방위 적으로 행해지는 이 공작에 때론 ‘남성 페미니스트’가 무력해짐을 인정하자.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자. 그 중간 서는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내 위치를 생각하자.

압생

|압생트

이 글은 두 번째 쓴 글이다. 처음 쓴 글을 지워버리고 쓴 글. 원래 나는 어떤 남성페미니스트가 도구적으로 페미니즘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하나하나 준거를 들며, 이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그렇다면 무엇이 남성 페미니스트가 갖추어야 하는 것인지 자신하며 글을 썼다. 글을 마무리했을 때는 몹시 불안했고, 결국 글을 지웠다. 어찌 이리도 쉽게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할 수 있었는지 후회했다.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남성, 내가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나는 ‘이성애자’이며 ‘남성’으로 받았던 혜택과 그 바깥의 이들에게 행해졌던 폭력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 스물 두해동안 말이다. 아, 군대도 다녀왔다. 그 안에서 나는 ‘남자다움’에 대한 의문 없이 수많은 다른 이들처럼 상급자에게 복종하고, 하급자에게 권위를 부렸다.

그런 내가 복학 후 책읽기 모임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다. 우연한 계기였다. 어쩌면 내가 ‘대학’에 다니기에 얻은 특권일지도 모른다. 책으로 읽은 페미니즘은 현실에서 내가 감각하지 못했던 착취와 억압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리고 나는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페미니즘을 공부한 이유는 죄책감이었다. 학교, 군대, 아버지가 행하는 폭력의 대상이어 온 내가 폭력의 주체였다니. 알아버린 마당에 다시 폭력의 가해자, 혹은 동조자가 될 수는 없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시간이 지속됐다. 페미니즘을 말할 때면 언제나 자기검열과 자기비판이 함께했다. 이 행동은 혹 폭력이 아닐지,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언제나 스스로를 향해 고민하던 내가 미약한 수준이지만 페미니즘을 알고 말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은 ‘내 위치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을 앞질렀다. 그렇다. 자기검열에 갇혀있던 내가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오늘. ‘남성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문장 한 문장을 써 내려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펜을 놓고 그 원인을 고민했다. ‘내가 도덕적으로 말하고 있나?’ ‘엄숙주의적인 접근이 아닌가’하는 생각들이 이어져, ‘내가 그들과 공유하는 ‘남성’이라는 기호를 잊었다’라는 결론으로 닿았다. 너무도 자연스레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남성페미니스트’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남성 페미니스트를 잊고 페미니스트만을 기억할 때

계속된 공부 속에서 나는 내가 여전히 공유하는 ‘남성’이란 지위를 잊었다. 언제나 나의 고민은 ‘페미니즘’에만 방점을 찍었고, 그 과정에서 ‘이성애자 남성의 페미니즘’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오만하지 않은가. 그런 내가 어떤 남성페미니스트의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

그들을 비판하며 나는 페미니즘은 ‘권력관계의 문제’라고 말했고 서양과 동양, 이성과 감성 등 남성중심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은 양자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강요 한다 적었다. 그 역할들은 언제고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지닌다는 문장이 이어졌다. 그 시작에는 ‘남성과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을 붙였다.

배분된 역할과 비대칭적 권력이 문제의 본질이라 말하며, 자연스레 내게 ‘남성페미니스트’를 꾸짖는 ‘페미니스트’의 역할을 허락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분법을 비난하기 위해 이분법을 차용하고, 남성페미니스트를 비판하며 내가 남성페미니스트임을 잊었다. 오만함과 상상력의 부재는 내가 ‘이성애자 남성’으로 자라온 스물 네 해 동안의 사회화 과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성애자 남성은 태어나지 않고, 다만 구성된다. 자연적이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적이 탄생된 것이다. 이 ‘구성’의 과정이 사회화에 지배적 영향을 끼치기에, ‘남성페미니스트는 언제나 나의 페미니즘이 남성중심사회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문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출산”과 같이 여성에게 의무화 되었던 역할을 더욱 장려하는, 혹은 ‘내가 더 강하니까 지켜주겠다’는 섣부른 정의감을 지닌 페미니즘에 우린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폭력이다’라고 말해주지 않는 남성중심사회의 치밀한 공작을 기억해야한다. ‘너는 가해자가 아니다’며 전 방위 적으로 행해지는 이 공작에 때론 ‘남성 페미니스트’가 무력해짐을 인정하자.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자. 그 중간 서는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내 위치를 생각하자. 성 억압의 대상에서 한발 비켜있는 이성애자 남성이 착취와 폭력을 끊는데 역할하기 위한 전제들이다. 당신의 고민이 ‘아버지의 세계’를 부수려는 ‘오빠의 페미니즘’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이성애자 남성의 방법론’은 안타깝게도 ‘남성중심사회’의 문법에 더욱 쉽게 포섭되곤 하니까.

나는 외면했지만 ‘이성애자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은 계속해서 비판과 검열의 시간을 요구해왔다. 이를 무시해온 나에게는 불행히도 ‘나는 당신들이 욕하는 한남충이 아니다’라는 문장만이 변명으로 남았다. “이론의 공부와 실천으로서의 자기비판”을 거들먹이며 저들에게 던진 비난의 화살을 내게로 돌리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앞으로 이어질 ‘내 위치에 대한 고민’은 나의 모든 ‘페미니즘’에서 몇 겹의 고민을 얹어 줄 것이다. 그렇다고,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명명을 그저 개인이 항상 담지해야 할 고민만으로 읽지는 않으려 한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그 자체로 ‘남성 대 여성’ 혹은 ‘여성의 이기심’과 같이 문제를 ‘성별환원적’으로 호도하는 행위에 저항하는 이름이다. 잠시간 잊었다. 나는 페미니스트를 꿈꾸는 ‘이성애자 남성’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