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긋 쫑긋] ‘진실의 힘’ 이사랑 간사를 만나다

그래서 북토크 때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고민해도 괜찮아, 이런 나도 있잖아.

이사랑간사사진1 알지비

|고구미

‘활동가’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있다. 이들은 가려져 있지만, 늘 존재한다. 공익적인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활동가’라는 이름은 가치있지만 막상 짊어지기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지난 4월,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 동문을 만났다. 그녀는 이렇게 위로했다. ‘고민해도 괜찮아. 이런 나도 있잖아.’ 자유인문캠프는 세월호 2주기를 기억하기 위해 ‘기억과 기록’이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진실의 힘’에서 출판한 <세월호, 그날의 기록>으로 북토크를 진행했다. 그 행사에서 이사랑 간사를 만났다.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이 모여 직접 세운 단체인 ‘진실의 힘’은 세월호 유가족들 역시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생각으로 세월호 사건을 기록했다. 이 단체에 들어와 처음으로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이사랑 간사는 ‘활동가’의 삶을 선택하기까지 수없이 많은 고민을 반복했다. 지금의 단체를 만나기까지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활동가가 된 후에도 활동가로서의 태도, 활동가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태도, ‘여성 활동가’의 삶 등, 고민거리는 끝이 없었다. 그녀의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고민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그녀의 고민 속에서 나는 수많은 ‘나’를 발견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활동하고 계신 ‘진실의 힘’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어요?

저는 중앙대 법학과 05학번이고, ‘진실의 힘’ 간사 이사랑입니다. 780년대에 간첩조작사건이 굉장히 많았잖아요.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국가 기관에 끌려가서 간첩이라고 고문을 받았어요. 지금도 ‘간첩이요’, ‘빨갱이요’, ‘좌파요’하면서 욕을 하잖아요. 780년대에 간첩이 된다는 것은 불가촉천민처럼 된다는 의미예요. 가족들도 면회를 오지 못하는 상황이죠. 그러다가 (피해자들이) 감옥에서 우연히 엠네스티가 양심수들에게 쓴 편지를 받게 되었어요. (양심수들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응원을 받고, ‘내가 나중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면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그런 생각이 이어져서 피해자들이 직접 ‘진실의 힘’을 만든 거죠.
‘진실의 힘’에서는 진상규명을 해요. 진상규명이 별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복기하는 거예요. 복기하는 과정에는 받았던 고문을 복기하는 것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심리치료와 음악, 영화, 여행 등 다양한 치료를 병행하고 있어요. 또한 고문이나 국가폭력의 재발방지를 위해서 아시아 쪽의 시민단체들, 특히 버마나 여러 국가의 단체들과 연대 사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방황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어떤 학생이셨나요?

대학생들은 대부분 뭐 먹고 살지 고민하잖아요. 저는 그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법학관데, 제가 생각한 공부랑 되게 달랐어요. 뭔가 ‘중앙대, 법학과, 05학번’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졌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들, 학과 공부나 대학생활이나 이런 것에 적응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게 아닌 다른 것들 중에 나한테 맞는 옷이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 많이 했어요. 대외 동아리 활동도 많이 하고, 인도여행이나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그랬죠. 한국사회에는 정형화된 규칙들이 있잖아요. 20살, 21살 때 해야 하는 것들이 정해져있고, 그외의 것을 하면 이상하게 보고. (한국에서는) 내가 너무 다르게 사는 건가 고민이 많았는데, 여행을 하는 동안에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엔 참 여러 삶이 있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런 방황을 하다가 졸업 직전 학기에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지원하는 NGO에서 인턴을 했어요. 7~8개월 정도 일하는 동안 정말 많이 배웠지만 일하면서 많이 좌절을 했답니다. 활동가로 사는 게 너무 힘들 것 같더라고요. 나의 상사를 보니 사생활도 없고, 여가를 제대로 즐기는 것도 아니고, 일은 너무 많았어요. 그렇다고 상사만큼 잘할 자신도 없고, 이런 마음 상태로 뛰어들면 모두 망하겠다는 생각에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가는 하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선언 아닌 선언을 했죠. 엄청 방황을 하면서 좋은 기회들을 다 망쳤어요. 그래도 영어를 좀 하니까, 새로운 일을 찾으려고 영어를 가르치거나, 번역이나 통역을 하는 일을 했어요. 근데 그건 또 그거대로 괴로웠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나랑 가치관도 너무 다르고. 그러다가 진실의 힘을 만나게 됐죠.

‘진실의 힘’ 만나게 된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시겠어요?

그렇게 방황을 하다가 우연히 ‘국제소농조직’이라는 곳에서 통역 일을 하게 됐어요. 정치, 경제, 환경 등을 다루었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제 자신이 너무 행복한 거예요. ‘이젠 다시 (활동을) 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다가 (2014년도) 6~7월 달쯤에 우연히 ‘진실의 힘’ 사무실에 처음 오게 됐어요. 그때 ‘진실의 힘’에서 인턴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고문피해자가 직접 만든 단체가 세계 어디에도 거의 없어요.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진실의 힘’은 피해자들이 만든 단체잖아요. 여기라면 내가 일하는 동안 일상에서 계속 동기부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결국 두 달이라는 면접기간을 거쳐서 이곳에서 일하게 됐죠. (웃음) 정말 힘들었어요.

활동가 2년차이신데, 활동가로서의 삶에 대한 불안감이나 만족감이 있는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활동가의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하고 겁을 많이 냈어요. 금전적인 면도 그렇고, 근무시간은 당연히 많을 테고, 이에 따르는 평가는 상대적으로 좋지 않죠. 활동하는 의사, 변호사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잖아요. 활동가로서 살지 않았던 기간에는 내가 어떤 것을 원하는 사람인지 잘 몰랐어요. 고민을 해보니까 저한테는 중요한 세 가지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가.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버틸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잉여로 있을 때도 힘들었고, 애들 가르칠 때도, 통역할 때도 다 힘들었어요. 다만 이 힘듦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세 가지가 충족되면 내가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내가 행복한지, 안 행복하다면 왜 그런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나이 서른이 돼도 불안한 건 똑같죠. 근데 저는 활동가이기 때문에 이 고민을 하면서 죄책감이 별로 없거든요. 어떤 큰 사건보다도 그냥 일상에서 하게 되는 작은 일들 있잖아요. 아주 작게는 카페에 가서 돈 낼 때 카드를 어떻게 건넬 것이냐는 등 일상에서 하게 되는 작은 고민들이요. 활동가가 되면서 예전에 비해 고민의 결도 달라지고, 고민할 때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아요. 일을 할 때 하는 고민들은 고민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고, 그 고민을 얘기했을 때 함께 걱정해주고 고민해주는 동료가 있다는 게 정말 기쁘더라고요.

그렇다면 ‘진실의 힘’에서 일하시면서 겪었던 일들 중에 고민거리를 남겼던 사건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왔어요. 방송국에서 무슨 작가라는데 프로그램을 기획한다고 피해자 한 명을 연결해달라고 했어요. 저희는 정확한 프로그램의 내용을 요구했지만, 그쪽에서는 제가 간사인데다가, 목소리가 어리고 이러니까 ‘내가 피해자들을 위해서 이런 훌륭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는데 왜 비협조적이냐’, ‘(내가) 간사랑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는 반응이었어요.
피해자 얘기라고 하면, 뻔하죠. 고문 받은 이야기를 해달라는 건데, 그런 진술을 요구하면 (피해자들이) 또 고통을 받는 거잖아요. 이런 거에 대해서 자기들이 선심 쓰는 것 같이 얘기하는데다가, 제가 활동가라는 이유로 어떤 예의도 갖추지 않았어요. 그때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엄청 울었어요. 그랬더니 상임이사님이 말해주시길, 앞으로 활동가로 살면 이런 일들 정말 많을 거고, 활동가는 누구랑 누구를 매개해주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내 분야의 전문성은 내가 알아서 세울 수 있고, 스스로 내공을 쌓으려고 끈기 있게 노력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게 굉장히 기억에 많이 남았죠.

방금 말씀해주신 이야기가 ‘여성활동가’라는 점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혹시 ‘여성 활동가’로서 느꼈던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요?

지역감정이라든지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든지 이런 걸 어릴 땐 모르고 살았어요. 부모님이 그런 부분을 굉장히 조심하는 사람이셨어요. 그러다 사회에 나오니까 이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더라고요.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 같은 경우는, 작년에 많이 고민했던 게, ‘우호적 차별’이라고 해야 하나, 그거에 기분이 되게 많이 나빴어요. 예를 들어서 어느 자리 가서 소개를 하면, ‘어유, 이사랑 간사 너무 예쁘죠?’, ‘여성 활동가 있으니 자리가 밝아지네요’ 이런 얘길 들어요. 그러면 기분이 너무 나빠요. 왜냐하면 제가 그 자리에 간 건 ‘여성’이 아니라 ‘활동가’로서 간 거잖아요.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활동가로서 일한다면, 어떤 활동가가 되고 싶으신가요?

감사하게도 저에겐 훌륭한 롤모델이 있어요.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상임이사님이 저랑 20살 차이예요. 중견 활동가죠. (이사님은) 본인이 하는 일이 이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아랫세대의 친구들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하시는 분이에요. 고민을 잘 들어주시고, 기다려주세요. 저를 재촉하면 제가 쑥 들어가 버릴 걸 아니까. 그리고 문제점은 날카롭게 분석해주세요. 잘못된 것도 잘 풀어서 설명해주시기 때문에, 제가 고민을 해도 된다는 안도감을 주시죠. 간혹 훌륭한 중견 활동가들은 기획부터 실행까지 쫙 본인이 해요. 내공이 쌓였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밑에 사람들은 시다바리 역할밖에 하지 못하거든요. 세대교체가 어려워져요. 저는 그런 미묘한 경계를 잘 알 수 있는 활동가가 되고 싶어요.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간사님이 ‘진실의 힘’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작업하신 결과물인 것 같은데요. ‘진실의 힘’에서 세월호 사건을 기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진실의 힘’은 진상규명을 한 경험이 있는 단체잖아요.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단체죠. 2015년 5월달에 세월호 관련 재판에 가게 되었다가 故박수현 군 아버지를 만나게 됐어요. 그 자리에서 수현이 아버지가 세월호 관련 자료를 종합적으로 보고 있는 단체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수현이가 선실에서 남겨 놓은 동영상이 있는데, 아버님은 그게 수현이가 남기고 간 숙제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침마다 수많은 기록을 수현이 책상 앞에 앉아서 검토를 하셨대요. 그 얘기를 듣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확보해서 총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고문 생존자들의 길과 세월호 유가족의 길이 겹친단 생각도 들었고, 그렇게 프로젝트팀을 결성하게 됐죠.
3TB(3000GB), 16만 장이라는 방대한 양의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서’ 총체적으로 기록해보려고 했어요. 어떻게 이 사건을 잘 정리할 수 있을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변호사, 기자, 활동가들과 협업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는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같이 해야 하는 구나, 하고 크게 느꼈어요.

오랜만에 모교에 돌아와 북토크를 할 때 느꼈던 생각도 궁금합니다.

북토크 연락이 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학교에 정말 적응을 못했었기 때문에, 중앙대와 제가 연결고리가 생길 거란 생각을 못했거든요. 그 당시가 되게 힘든 때였어요. 이 책에 대한 내 마음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썸남이랑 관계를 정리하는 느낌으로(웃음). 북토크를 통해서 여러 가지로 마음정리를 했죠. 북토크를 준비하면서 후배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강연을 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두 가지 느낌이 들었어요. 극도의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고, ‘그래도 내가 지금 하는 게 잘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죠. 그래서 북토크 때 이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고민해도 괜찮아, 이런 나도 있잖아. 제 얘기가 어떻게 전달됐는지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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