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도적 정치와 극단적 사회를 넘어

우리는 형식 자체가 아니라, 형식과 내용의 관계가 뒤집어진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

IE001817198_STD

| 귀염둥이원숭이몬

중립과 타협의 정치를 좋아하던 이들에게 호시절이 왔다. 오른쪽에 위치한 새누리당이 복지 이슈를 선점한 2012년 이후, 여야의 이념적 구분은 이제 모호해졌다. 적어도 제도권 정치에서 복지라는 단어는 이제 레드컴플렉스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따뜻한 보수를 주창한 새누리당의 유승민이 인기를 끌었고, 더불어민주당의 김종인은 경제민주화를 의제로 제1야당을 차지했다. 한국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끝자리를 차지하던 통합진보당은 해산된 지 오래다. 그 외의 진보를 표방하던 정당들 역시 총선에서 지리멸렬했다. 그렇게 끝은 사라지고 중간만이 남았다.

정치의 시소가 수평을 유지하는 동안 사회는 한쪽 끝으로 기울었다. 각종 인터넷상에는 혐오가 만연했고 혐오에 맞서는 반-혐오 역시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중이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정치 시스템이 돌봐주지 못한 세월호 유족들과 정치 시스템으로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일베의 모순된 공존이 포착됐다. 최근의 ‘강남역 10번 출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의도 정치에 항상 요구하던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여성들의 그간 쌓여온 분노는 폭발했고, 그 분노에 공감 대신 또 다른 분노로 맞서는 남성들이 광장으로 나섰다.

중도적 정치와 극단적 사회. 이 두 가지로 한국을 요약하는 거친 방식에 비관적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여전히 규제 철폐와 시장의 자유를 외치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을 펼치던 군사정권을 비호하는 이들이 보수 진영의 상당수다. 비슷한 사례는 넘친다. 교과서를 시장이 아닌 국가에 맡기자는 자유주의자.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해 세월호 특별법을 반대했지만, 행정부의 수반이 입법부의 여당에 간섭하는 행위에는 눈감아주는 법치주의자. 여전히 중도적 정치의 영역에 한국은 다가서지 못했으며, 극단적 사회에 어울리는 제도 정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은 일정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중립의 영역으로 한국 정치를 설명하는 건 설득력이 크게 떨어지진 않는다. 중립의 영역을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경제 국면에 따라 시장자유와 복지를 유연하게 택하고, 정당 민주주의를 철저히 고수하는 체제. 물론 이번 총선의 결과만으로 그간 쌓여온 한국 정치의 적폐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런 중도적 성향을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인기를 끈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렇다면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합의한 정치권의 모양새와는 다르게 사회는 왜 이토록 극단적인 걸까.

다행인 일인지 모르지만, 중도적 정치와 극단적 사회의 인과관계를 잴 수 있는 데이터는 세계에 산재한다. 관용의 정치가 일상이었던 여러 유럽 국가에선 극우 정당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자유와 다양성으로 대표되던 미국에서는 폐쇄경제와 인종차별을 슬로건으로 내건 트럼프가 유력 대선 후보에 올랐다. 기존의 정치권과 언론은 현상을 제대로 설명 못 하고 우왕좌왕했다.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에 제도 정치권은 준비가 안 됐던 셈이다.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의 사례는 이미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가 합의된 정치권을 뚫고 들어온 사례다. 물론 한국은 아직이다. 하지만 징조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광장에 나타난 일베 등으로 이를 설명하는 건 구식이 됐다. 이제 진보정당들이 꿈꾸던 3%의 득표율에, 노골적인 혐오를 내건 기독교 정당이 거의 다가섰다.

이후 중립의 정치가 극단적 사회를 낳았다는 많은 글이 나왔다. 중도의 정치가 주창했던 관용과 복지 제도가 역으로 무임승차에 대한 혐오를 낳았다는 분석은 나름 유명하다. 미국의 백인들은 그렇게 트럼프를 지지했고, 유럽의 자국민들은 국민전선에 투표했으며, 한국의 일베는 강남역의 여성단체 앞에서 혐오를 표출했다. 하지만 의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중도의 정치를 지지한 것도 어쨌든 정당민주주의의 대중이고, 극단적 사회의 구성원도 대중이다. 대중의 멘탈리티는 대체 뭘까. 주변 사람들을 뒤져봐도, 세월호는 유족들의 고집에 불과하고 여성들은 차별받은 역사가 없으며 외국인 노동자를 쫓아내야 한다는 식의 혐오론자들은 크게 많지 않다.

해답에 대한 힌트는 극단적 사회가 아닌 중도적 정치를 지지하는 멘탈리티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중도진보가 선점했던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이 중도보수와 이어지는 논리를 주목해야 한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시장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는 소비의 선순환이 필요하다. 소비를 위해서는 결국 시민들에게 복지 차원으로 제공되는 소득이 필요하다. 이렇게 중도보수는 지속적 경제성장을 위한 합리적 대책으로서 복지를 강조해야만 한다. 즉, 경제성장이라는 주요 목표와 어긋나지 않는 복지를 합리화하면 중도보수가 된다. 반면 보편적인 재분배에 어긋나지 않는 시장의 자유를 합리화하면 중도진보의 논리다. 중도는 실용적인 차원과 긴밀히 연관 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형식적인 논리가 주요 변수인 셈이다. 보편적 인권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과 같은 ‘감성팔이’ 식의 논의는 더 이상 중도를 설명하는 데 필요없게 됐다.

형식에 대한 집착. 이 강박증은 중도적 정치와 극단적 사회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세월호는 배가 뒤집혀 학생들이 죽은 사고며,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은 한때 신학생이던 정신병자에 의해 한 여성이 살해당한 참사다. 비합리적으로만 보이는 극단적 세력들은 형식적으로 완벽한 이 문장들에 철저히 집착한다. ‘팩트’라는 단어와 함께 ‘순수한’이라는 수식어는 극단적 사회의 유행어다. 침몰한 배와 묻지마 살인이라는 팩트로 추모를 하면 ‘순수한 추모’이며, 국가의 책임과 젠더의 문제로 한 발자국 나아가면 ‘불순하고 정치적인 추모’가 된다. 사건의 배경과 구조, 피해자들의 슬픔과 분노, 모멸감 등 ㅡ 진정성을 구성하는 변수들은 형식적 논리 앞에서 으스러진다.

복지는 필요하지만, 경제성장은 해야만 한다. 세월호는 슬프지만, 삼권분립은 지켜야만 한다. 정치는 혐오하지만, 투표는 해야만 한다. 여성은 꽤나 피해를 보지만 팩트를 고수해야만 한다. 철저히 다르게만 보였던 중도적 정치와 극단적 사회의 면모는 이제 뒤섞인다. 그럼에도 법과 팩트 같은 기준이나 형식은 중요하다고, 중립에 선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다. 옳은 말이다. 다만 우리는 형식 자체가 아니라, 형식과 내용의 관계가 뒤집어진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 원래 정치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공동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중도적 정치는 경제성장과 정당민주주의라는 형식적인 기준에 머문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공동체를 서로 보듬기 위한 집단이지만, 극단적 사회는 법과 팩트라는 형식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배척한다. 경제성장을 위한 복지, 투표를 위한 정치, 법을 위한 사회. 모두 형식과 내용이 뒤집힌 문장들이다.

텅 빈 형식을 겉도는 수많은 동어반복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지만 중도적 정치와 극단적 사회의 이분법을 가볍게 부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베트남 여성들에게 사죄의 손을 내민 한국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 혹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꼭 안아준 한국의 세월호와 영국의 힐즈버러 참사 유족들은 어떨까. 중도적 정치나 극단적 사회가 추구하는 형식적인 것들은 그들의 상처받은 얼굴 앞에서 무의미했다. 기존과 전혀 다른 법과 윤리, 책임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이제는 고통받고 헐벗은 이들의 구체적인 표정이 절실한 윤리 지침이 될 시대가 왔다. 중도적 정치나 극단적 사회의 이분법을 넘어서야만 할 때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