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융복합 교육의 허상을 직시하라

‘학제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선진적인 것이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고수하는 것은 후진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이 공고하게 작용함으로써 대학교육의 근본적인 틀이 무너지고 있다.

| 영인

오늘날 대학에서 ‘융복합’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많은 대학에서 둘 이상의 분과학문을 통합한 융합학부(과)가 만들어지고 있고, 학문 간 경계는 점차 옅어지는 추세다. 전국에서 새로 만들어진 많은 학과들에는 창의, 창조, 융합이라는 단어가 마치 조미료처럼 들어간다. 올해 중앙대도 프라임 사업의 일환으로 예술과 공학을 접목한 ‘휴먼문화기술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을 신설할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가에서는 컴퓨팅적 사고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인문·예술계열 학생들에게도 IT 관련 수업을 의무적으로 수강하도록 하는 등 융복합 교육이 상당 부분 이뤄지고 있다.

대학에서 융복합 인재 양성이 강조되는 데에는 교육부의 영향이 크다. 교육부는 재정지원사업을 통해 대학에 융복합 교육체계를 구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들은 부족한 재정을 충원하기 위해 교육부의 입맛에 맞게 학사구조를 개편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보니 모 대학에서는 융복합학과의 예로 국문학과와 전자전파공학과를 합친 ‘웹툰창작학과’가 신설될 수도 있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정부는 융복합 인재 양성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것일까. 이는 세계경기 침체와 경쟁력 하락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한 국가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되면서 개인의 창조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창조산업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2013년 당시 박근혜 정부가 핵심 국정과제로 내세운 ‘창조경제’는 상상력과 창의성을 기술 분야에 접목하여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따라 학문 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융복합 인재가 바람직한 인재상으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한동안 ‘인문학적 상상력’이 강조되었던 현상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창조경제는 특유의 모호함과 실체 없음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오죽하면 박근혜의 창조경제를 안철수의 새정치, 김정은의 속마음과 묶어 ‘3대 미스터리’라고 부를 지경이다. 창조경제가 의도했던 일자리 창출 효과는 현실에서 미미한 영향을 미칠 뿐이었으며, 문화·창조산업 부문의 불안정성과 노동소외 문제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당장 취업난에 쫓기는 청년들에게 마음껏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실물경제 위기의 직접적인 대안을 내세우기보다 대학을 포함한 교육기관에 융복합 교육을 추진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수익성 위기를 타개할 인재들이 알아서 나타나기를 바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프라임 사업에서 잘 나타난다. 프라임 사업의 비전은 ‘창조경제를 견인할 학생 중심의 산업연계 선도대학 육성’이다. 사업에 참여하는 대학은 ‘학문간 융복합’ 및 ‘융복합 교육과정 확대’ 요구에 맞춰 학사구조를 개편해야 한다. 이처럼 정부는 고등교육의 목표를 당장의 일자리 수요에 맞춰 산업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노동력을 육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따라 학사구조가 ‘응용’ 위주의 학문을 중심으로 개편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박탈되는 교육선택권과 부실한 커리큘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학생들의 몫이다. 학문의 기반이 침식당하고 비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교육은 점차 힘을 잃게 되겠으나, 공적인 장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논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융복합’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에는 ‘학제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선진적인 것이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고수하는 것은 후진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이 공고하게 작용함으로써 대학교육의 근본적인 틀이 무너지고 있다. 대학이 산업수요에 맞게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에 복무하여 겉으로는 그럴싸한 ‘융복합’이라는 수사에 매몰된다면, 대학의 위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반복될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학에 ‘융복합’이라는 키워드를 던져 놓은 채 고등교육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방관하는 정부의 태도는 충분히 문제적이다.

오늘날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융복합’이라는 형식만을 취한 하향식 교육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었을 때, 비로소 창의성은 잉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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