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음란한’ 퍼레이드는 누구를 불편하게 하는가

그러니까 노출 자체가 문제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 플루키

“서울시는 동성애광란음란축제를 금지하라.” 6월 11일로 예정되어 있는 제17회 퀴어문화축제에 앞서 축제의 적법성에 관한 가처분 심리가 진행됐다. 백주대낮에 서울 시청광장이라는 공공장소에서 노출을 일삼는 ‘음란한’ 퀴어문화축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퀴어문화축제가 ‘선량한’ 시민의 ‘건전한’ 성 문화를 오염시킨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음란’이라 함은 함부로 성욕을 자극 또는 흥분시킴으로써, 보통 정상인의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통 정상인’이라는 애매한 정의가 말해주듯 음란함의 기준은 사회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습하고 반복적으로 수행해 온 성적 규범이 존재한다. 이는 대개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 남성의 시선과 일치한다. 남성의 가슴 노출은 일상적으로 이뤄지지만, 여성의 가슴 노출은 음란하다며 지탄의 대상이 된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이러한 남성 중심의 성적 규범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적으로 이뤄진 유럽과 미국에선,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 운동의 맥락에서와 마찬가지로 퀴어운동에서도 노출은 ‘정상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퀴어(Queer)는 성소수자 일반을 뜻하는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기묘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본디 퀴어는 규정될 수 없는, ‘정상적 섹슈얼리티’ 규범에 구속받지 않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여성 해방을 위해 여성들이 브래지어를 벗어재꼈듯이, 맨몸을 드러내는 행위는 경직된 성적 규범에 대한 저항인 셈이다. 세계 최대의 퍼레이드인 삼바 카니발의 노출에는 열광하면서 유독 성소수자의 노출에만 ‘음란함’의 딱지가 붙는 이유이다. 거기엔 불결하고 병적이라는 성소수자를 향한 사회의 왜곡된 편견도 깔려있을 게다. 그러니까 노출 자체가 문제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동성애를 할 거면 보이지 않게 하라”는 거다. 하지만 여성이나 흑인과 달리 직접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성소수자에게 ‘커밍아웃’은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출발이다. 한나 아렌트는 ‘공적 세계를 주체적으로 향유하며, 발언할 수 있는 삶’을 공적 존재로서 인간의 기본조건으로 꼽으면서, 저항의 공간으로서의 공적 공간의 역할에 주목한다. 성소수자를 사적영역으로 몰아내는 행위는 공공영역을 배타적으로 전유하려는 ‘정상적’ 섹슈얼리티 질서의 폭력인 셈이다.

사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비난은, 노출보다도 ‘성소수자’라는 낯설고 다른 존재에 대한 불편함과 공포에 기인한다. ‘음란한’ 퍼레이드라는 시선이 ‘한국 정서’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편견으로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고 싶은 욕망은 아닌지, 혹은 억압적인 성적 규범이 지나치게 내면화된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자긍심 행진(pride parade)’이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일 년에 단 하루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내며 해방감을 느낀다. 조금 불편할지도 모른다. 참고 들어보시라, 부정당한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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