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뭘까] 침대는 과학이다.

태초에 우리를 서로 눈치 보게 할 (둘이 누울) 침대가 있었다.

| 구구

“침대는 과학이다”. 스프링의 탄성은 계산되며, 압력을 받은 매트리스가 얼마나 재생되는지는 누군가에겐 중요한 문제다. 빽빽한 매트리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푸집같이 누운 자리만 푹푹 꺼지는 것을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은 (분수에 맞지 않는) 라텍스 위에서의 잠을 꿈꾼다. 무튼, 이들의 취향이 침대를 만드는 것인지, 침대가 이들의 취향을 만드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취향과 과학은 맞물리고 우리는 편안하게 “침대는 과학”이라 말한다.

‘어떤 스프링과 어떤 매트리스’가 침대의 과학이라면, 그 위에서는 잠을 자는 ‘인간’에게는 동시에 어떻게 자야하는가를 말하는 ‘과학’이 있다. 새우 잠을 자는건 어떻다더라, 업드려자면 어깨가 넓어진다는데 , 하늘보고자면 잠이 잘온다더라. 그러니까 사짜이건 진짜이건 ‘침대위의 잠’에 관한 이야기들, 우리의 머리를 스치는 일련의 ‘썰’들은 침대 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과학을 구성한다.

침대 위의 과학이 저 뿐이던가. 침대 위에서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과학을 더 고려해야 한다. 그 과학은 ‘관계’에 기반한다.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지, 마주보고 자는 게 좋을지, 등을 지는 것이 좋을지. 어젯밤 본 드라마에서 팔 배게를 안정적으로 건네던데, 아무래도 내 팔뚝에는 배겟솜이 부족하구나,.라는 좌절이 이따금 동반되곤 하는 이 과학이란 ‘관계 설정’에 따라 성가심을 수반하며 변모한다. 애인과 있을 때는 애인과 잘 때의 과학이, 친구와 잘 때는 친구와 자는 과학이, 친구도 애인도 아닌 사람과 잘 때는 친구도 애인도 아닌 사람과 자는 과학이 우리를 스친다.

나는 그 규범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쪽에 속했다. 연애는 관계의 형식이며, 데이트가 실천일 때, 어센틱하고, 진실하며, 참트루로서 추구해야할 것은 ‘형식과 실천’이란 구체적 영역이 아닌 (그래!) 모호한 진실인 저 ‘사랑’아니겠는가. ‘그 과학이란 것은 벗어나야 마땅한 것이다’ 파랑보단 빨강이 좋았고. 록스타보다는 개화기 청년소설의 주인공을 사랑했더랬다. 아! 진실, 그것은 형식이나 규범이 될 수 없다. 침대 위라고 다를 것 있을 테인가. 오 그곳에, 과학이 개입하지 않게 해주오.

하고 생각할 수록 내 침대 위는 어째 적막해져 갔다. 그때의 나는 진정 성실하지 못했다. 2분도 채 안되는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몇 시간 줄을 서 기다리는 것이 데이트라면, 나는 그런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연애가 “해야”하는것과 “보여야하는 반응”으로 가득 찬 것이라면, 연애 역시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직 남는 것은 ‘사랑’이었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성실하지 못했다. 규범을 부정하고 싶다던 나는, 벗어날 수 없는 관계와 관계의 과학이란 마수같다고 생각하며 겸연 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슬며시 늦은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관계가 양 손바닥을 적당한 타이밍과 강도로 마주치며 박수 소리 채워가는 일이라면, 나는 자주 손바닥 내미는 것이 늦는 사람에 속했다. 그 사람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른 뒤, 곧이어 내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는 이런 시간 차 공격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대각-스파이크를 날리곤 했다. 스파이크는 조용히 코트를 때렸고, 침대 위는 적막했으며, 나는 어색했다.

마지막 순간은 갑작스레 왔고, 나는 호수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옆에 앉은 이는 “불성실”이라는 단어 대신,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 같다”고 말했다. 그것이 감사하면서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는 내게 이별을 겪는 사람의 코드화된 이미지를 허락했다. 나는 그 틀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어서 헤어지게된 ‘성실한’ 구-연애자를 연기를 하면서,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우리는 호수를 지나쳐 서로 반대쪽으로 걷기로 했고, 영영 그렇게 했다.(놀랍게도 그로부터 마지막 들었던 말은 화이팅이 었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화이팅이었을까)

여태껏 달고다닌 ‘규범거부’의 자랑스런 휘장이 무색하게, 나는 헤어짐의 ‘규범’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그 코드화된 이별을 연기할 수 있었던 건 되려 다행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이런 규범, 양식, 코드과 범주들 아래에 있었다. 분명 우리의 과거엔 분명 양식화된 사랑의 실천, 예컨데 ‘데이트’ 같은 것이 몇 차례 존재했었다. 놀이 공원이었고, 서울 근교의 관광지였고, 동물원이었다. 심지어 그날들의 나는 몹시 즐거웠다.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들이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는 사실과, 그렇다고 그 바깥을 상상하는 성실함을 보이지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결국 사랑과 관계가 모두 끝이 나서야, 나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1) 내가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법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면서 ‘과학을 부정한다’고 적극적인 곡해를 자행할 때, 타자는 지쳐갔다. (2) 규범의 벗어남은 꽤 근사한 일이지만, 쉽게 무책임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었고, (3) 진실과 이상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곳으로 향하는 길에 흙냄새가 사라질 때 ‘관계에 대한 불성실’은 폭력이 되어 나타났다. (4) 그럼에도 나는 겸연쩍은 듯 취하고 싶은 애정을 ‘사랑’이라고 요구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늦은 손을 내밀었다. (5) 부끄럽게도(또한 죄스럽게도)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늦은 손을 맞추기 위해 다시 손을 뻗는데 주저하지 않아줬다.

침대 위는 과학의 공간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바닥으로 내려와 누울자리를 정하고, 알맞은 매트를 함께 고민해서 너와 이불을 사러 가는 수고를 들이지도 (역시) 않았다. 나는 엉터리였고, nerd이면서도, 게으른, 그러면서도 느즈막히 손바닥을 내미는 영악한 사람이었다.

사랑에 관한 담론,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관계를 고민하게 한다. 수 많은 과학, 규범, 행동양식들이 쟁투하는 침대 위란 그래서 피곤한 공간이다. 침대 위에서 자연스러운 어떤 관계를 찾아헤메면서(때론 강박에 빠지면서), 역설적으로 자연스러운 어떤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일 역시 유쾌하지 않다. 헌데 이 성가신 것들은 동시에 필연적인 ‘관계’의 산물이며, 누군가는 규범이라는 마수와 쟁투하는 두려움, 그리고 관계에 깃든 수고를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침대 위는 헤게모니의 공간이다. 나는 그 의미투쟁을 무시하며 ‘이게뭐니’라 반문했고, 그람시는 뭐땜시가 되어 ‘낙관은 비관 앞에 무너졌소’라고 개화기 청년이 답할 때, 침대 위엔 적막이 계속되었다.

앞으로 사랑을 한다면, 거기에 ‘데이트’라는 이름을 붙여보고 싶다. ‘연애’도 해보고 싶다. 동시에 규범을 벗어나는 것을 꿈꾼다. ‘둘 만의 것’이 가능할 것이라 말하고 힘껏 손발을 오그리토그리하고 싶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너와 나를 낙관하고싶다. 형식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일을 꿈꾸면서도, 이제 나는 너를 가로질러 실천하는 사랑을 준비한다. 태초에 우리를 서로 눈치 보게 할 (둘이 누울) 침대가 있었다.

∗ 필자 한 줄 : 미숙하고 어색하면서, 엉터리인 사람이 nerd라면, 사랑의 주체로서 나는 nerd다. nerd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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