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환의 무방비 도시] 모호함이 사라진 자리

그렇기에 우리는 점점 모호하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다. 결핍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넓고 얕은 명확성들로 스스로를 정의해야 한다.

무방비도시1

| 홍주환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 김행숙 <이별의 능력> 중 –

 

이별을 겪은 화자(혹은 이별을 겪은 누구나)는 쉽사리 ‘당신’을 잊지 못하지만 당신을 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한다. 처음에 화자는 종일 ‘당신’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별의 기간이 이어지며, 그는 점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는 등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하루 중 어느 순간엔 당신이 문뜩 떠오르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해소할 수 없는 욕망에 아파한다.

왜 작가는 이별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장들을 나열하며 이를 두고 이별에 대한 시라고 이름 붙였을까. 이별을 명확한 언어와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별은 무엇이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저 은유의 문장들로 이별의 주위를 공전하며 이별의 의미와 속성을 어렴풋이나마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저 시인의 자세와 같을 것이다. 인간은 모호한 존재라는 철학은 인문학의 기저에 늘 놓여있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인간을 향해서 언제나 조심스럽다. 명확한 정의는 늘 경계되고 유보된다. 이는 결코 비겁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의 조심스러움에는 끈질김이 있다. 인간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 끝내버리지 않고 영원히 인간의 주위를 맴돌며 그 모호함을 탐닉하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를 증명하듯 인문학은 그동안 인간을 은유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창조해냈고 여전히 그러는 중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모호함을 다루는 문학이다. 그렇기에 한 대상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고, 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각자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위의 시를 읽고 이별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담담해진 화자의 마음을 느꼈다. 하지만 당신은 화자가 여전히 이별의 아픔에 시름 거리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내가 시의 화자를 남자라고 여겼다면 누군가는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여 다른 이는 시의 화자가 레즈비언이라 느낄 수 가능성도 있다. 뭐든지 괜찮다. 인문학적으로, 모두의 해석은 모호하고 평등하다.

인간의 모호함에서 시작된 모호한 이야기들은 다시 모호한 해석들을 낳는다. 그 수에는 제한이 없다.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하겠다는 인문학의 욕망은 끝없는 갈증처럼 해소될 수 없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을 둘러싼 모호함의 지평을 확장해갈 뿐이다. 이처럼 인문학은 완벽함에 수렴할 수 없다. 그러나 완벽함은 인문학의 목표가 아니다. 인문학은 단 한 순간도 완벽해지려 한 적이 없다. 오직 아름다워지려 한다.

이처럼 인문학은 모호함으로써 아름답다. 하지만 인문학의 대상이자 주체인 인간은 정작 모호함을 거부하고 있다. 특히 인문학적 소양이 요구되는 청년층에게서 모호함에 대한 기피현상은 심화된다. 입시 공부에만 몰두하며 시험 점수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해가고 취업 자기소개서에 스스로를 값비싼 상품으로 써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모호함의 삭제는 전 방위적으로 감각의 영역을 침범하는 중이다. 이성애자여야 한다는,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는,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헬조선’이지만 한국을 사랑해야 한다는,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뇌리에 박힌 생각들은 이제는 의지라기보다 강박에 가깝다.

면접장에서 ‘당신은 이 회사에 왜 지원했습니까?’라는 질문에 우물쭈물했다가는 금세 탈락을 면하지 못할 ‘을’이 된 듯, 우리는 언제나 ‘나는 어떤 인간이다’를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선언하지 못하는 모호한 자는 위험하거나 부족한 자로 여겨진다. 노동 시장에서 배제당한 비정규직과 여성-남성-이성애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성 소수자가 그렇다. 사회의 부조리와 의혹을 들춰내 정부와 기업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흔드는 좌파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들은 결코 성공해 ‘갑’의 위치에 갈 수 없다. 이제 모호함은 인간 아름다움의 본질적 속성이 아닌 결핍의 증거에 불과하다. 학교와 군대, 직장 그리고 대학마저도 ‘명확한 인간’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준엄하게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점점 모호하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다. 결핍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넓고 얕은 명확성들로 스스로를 정의해야 한다.

이 와중에 정부와 대학은 인문학을 육성한다며 각종 지원 사업에 세금을 쓰고 청년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인문학을 스펙과 구호로 전락시키고 명확한 인간을 생산해내기 위한 최선봉에 있는 것도 정부와 대학이다. 인문학에서 모호함을 지켜낼 마음이 없는 자들이 인문학을 부르짖는다. 가짜를 만드는 것은 역시 가짜밖에 없다.

 

* 필자 소개 | 홍주환 : 삐딱한 인간이다. 무엇을 접해도 그것에는 구조와 이데올로기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쉽게 얽매여 그것이 풀리지 않으면 앞으로 잘 나아가질 못한다. 누구에겐 필요 이상의 ‘진지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인간. 하나쯤 있어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다.

* 코너 소개 | 홍주환의 무방비도시 : 도시는 자본주의의 화신이다. 축적과 소비는 도시를 움직이고 확장시킨다. 도시에 사는 인간도 자본주의의 화신이다. 자본을 움직이는 자들은 인간을 자본화하고 자본화된 인간은 다시 도시를 자본화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인간을 이용해 도시를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시의 주인일까 노예일까. 축적과 소비는 이제 우리의 본능이나 다름없다. 축적과 소비의 논리로 다뤄선 안 됐던 영역마저 자본의 질량으로 계산된다. 분명 우리가 주인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무방비함이 계속된다면 언제 노예로 전락할지 모른다. 이미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혹은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격렬히 자신의 무방비함과 투쟁해야 한다. 마치 자신을 증오라도 하듯 격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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