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키온더트리] “최저임금 1만원”을 넘어서

최저임금 문제에 사회 구조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해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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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염둥이원숭이몬

 

한국사회에서 최저임금 담론은 ‘경제성장’과 ‘불평등’이라는 두 거대 담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얘기할 때 최저임금은 두 가지 관점으로 크게 나뉜다. 하나는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은) 고용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신고전학파의 비관론, 다른 하나는 ‘소비를 촉진시킨다(따라서 외려 경제를 활성화 시킨다)’는 케인즈주의의 낙관론이 그것이다. 반면 불평등의 관점에서 최저임금 담론은 저임금 알바의 계층적 위치에 주목한다. ‘알바와 고용주 간 정의로운 분배’에 초점을 맞춘 얘기들이 주를 이룬다.

위의 논의들은 대체로 ‘정치적’이다. 최저임금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대다수 경제학자들의 볼멘소리는 일정 일리 있다. 한국사회의 최저임금 담론은 역설적으로 최저임금 자체에 딱히 주목하지 않는다. 즉, 고용과 소비 그리고 불평등을 논의하기 위해서 최저임금 얘기를 꺼낸다. 치열한 논쟁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최저임금이 전체 임금과 고용의 문제로 둔갑하거나 불평등의 논의가 알바만으로 좁혀지곤 한다.

그렇다면 최저임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의제들은 반드시 해로운가. 그렇지 않다. 최저임금 논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계량 데이터들을 한 번쯤 보게 된다. ‘임금이 몇 % 증가하니 고용이 몇 % 감소한다. 소비는 몇 % 증가한다’식의 정교한 계량 기법 논쟁은 학계의 지겨운 논쟁이다.

팩트는 언제나 중요하다. 다만 사회적 담론조차 팩트에 매몰되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최저임금으로 최저임금 이상의 얘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정치가 지향할 일이다. 문제는 최저임금 담론의 정치적 위치를 명료하게 하는 작업이다.

 

경제학적 근시안에서 벗어나기

최저임금 담론이 경제성장으로 치우칠 때 경제학의 간섭이 시작된다. 최저임금에 관한 경제학의 가장 큰 고민은 임금과 고용의 관계다. 이 지점에서 주류경제학, 특히 신고전파 경제학은 ‘임금’의 다양한 결을 포괄하지 못한다. 사업자의 고용 측면에서만 얘기할 때, 임금은 그저 사업자가 짊어질 ‘비용’과 같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해 비용이 높아지면 고용을 줄이게 되니, 최저임금 인상은 적절한 대책이 아니라는 얘기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논의가 여기서 멈추면 노동자의 생산성 말고는 임금에 대해 말할 거리가 없다.

가령 임금이 오를 때 노동자가 그만큼 더 생산한다면 고용주는 그를 해고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오른 임금만큼 노동자가 생산하지 않으면 고용주는 해고할 것이다. 노동개혁을 촉구하는 대통령도, 시장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우파 매체들도 항상 한국의 낮은 노동생산성을 지적한다. 최저임금 인상에서도 마찬가지의 논리로 주류 경제학은 반박한다. 즉, 최저임금 인상 이전에 서비스업의 낮은 노동생산성을 우선 높여야한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임금은 단순히 노동자의 생산성을 반영하는 ‘결과물’일까. 그렇진 않다. 임금은 노동에 대한 몫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이기도 하다. 내 노동력을 보전할 수 있는 몫만큼 주지 않으면 지속적인 노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103만 원이면 한 달 생활비로 충분하다는 경총의 주장은 그 현실성을 떠나서 중요한 지점을 말하는 셈이다. 임금이 단순히 고용주의 비용이나 노동생산성만의 영역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이 지속가능한지 여부와 관련 있다는 얘기다.

결국 최저임금 인상을 말하면서 고용 감소만을 얘기하면 임금 결정의 사회적 맥락을 놓치게 된다. 단순히 도덕적이고 당위적인 얘기가 아니다. 노동자가 얼마나 생산했는지는 사후의 문제다. 고용하는 시점에서 고용주는 노동자의 노동이 아닌 노동력을 구입하는 셈이다. 이때 노동력의 가치는 이 사회에서 먹고 입고 자는 최소한의 생활비며,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몫이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노사 간의 협의와 입법 절차로 임금이 결정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임금을 말할 때는 노동자들의 생산성 이전에 여러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요인들을 검토해야한다. 단순히 편의점이나 식당과 같은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고 곧바로 임금 차원으로 연관 지으면 곤란하다.

 

최저임금이 불평등을 말할 때

자영업을 비롯한 서비스업과 제조업의 불균형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2013년 한국의 서비스업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OECD 24개국 중 21위인 최하위에 해당한다. GDP 세계 82위인 슬로베니아보다 낮은 순위다. GDP 세계 11위인 한국이 슬로베니아보다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니 이상한 일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영업자들의 규모가 비대해서다. 2014년 기준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26.8%로 OECD 평균의 두 배다. 자영업자들의 정체는 기업의 고용으로 흡수되지 못한 실업자들이 대부분이다. 몇몇 대기업만 우뚝 서있고 중소기업은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이들을 흡수할 경제기반이 없다. 경쟁이 치열하니 돈 벌기는 힘들고 노동생산성은 자연스레 역시 낮아진다. 노동생산성 수치는 비정상적인 한국 경제 구조를 드러내는 결과적 수치일 뿐, 문제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단순히 최저임금을 높여서 자영업자들이 망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을 단순히 생산성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자영업자들이 노동자들의 최소 생활비인 최저임금조차 지불하지 못하는 전체 맥락을 눈감게 된다. 이 지점에서 “최저임금이 오르면 소비가 증가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케인주주의식의 찬성 근거 역시 사회적 맥락을 놓친다. 최저임금을 지불하는 대부분 고용주들은 금융자본주의의 불안한 토대 위에 서있다. 최근 가계금융ㆍ복지조사 자료를 토대로 가계부채 위험군을 분석한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부채의 핵심 위험 요인으로 40대 저소득층 자영업자를 꼽았다. 소비하는 주체의 이해에 매몰되면, 경제 구조에서 취약한 계층 전체를 아우를 수 없다.

가령 케인즈주의식의 근거처럼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소비가 단순히 늘어난다고, 해당 비용을 지불하는 자영업자들도 번창한다는 보장은 없다. 소비와 생산의 선순환을 말하기 이전에, 대기업과 자영업자로 구성된 취약한 한국 사회의 경제 구조가 있다. 만약 소비가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대기업 프렌차이즈에서 일어난다면 지겨운 낙수효과 외에는 말할 거리가 없다. 단순히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는 계급간의 분배 차원을 건너뛰게 된다. 빚더미 위에 서있는 자영업자들의 계급적 위치는 최저임금 알바생들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결국 불평등 계급의 범위를 명확하게 인식해야한다. 불평등의 관점에서 최저임금을 바라본다고, 최저임금 받는 알바와 고용주를 단순히 대립시키는 주장은 오히려 실질적인 불평등을 간과하게 된다. 소수의 주장이지만, ‘최저임금 만원도 못주는 자영업자들은 망하는 것이 맞다’는 식의 관점은 오히려 한국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은폐시킨다. 경제성장과 소비에 매몰될 때 분배와 불평등의 차원을 사유할 수 없던 것처럼, 최저임금 담론이 불평등을 말할 때도 사회 구조를 정확하게 직시해야한다.

 

정치를 지향하는 최저임금 담론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아니라는 기계적 중립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글의 논지는 명확하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낮은 수준이다. OECD 26개국 가운데 중위임금의 44%로 18번째, 평균임금 대비 35%로 19번째로 낮은 편이다.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은 필요하다.

다만 여기서 그치면 곤란하다. 즉, 최저임금 문제에 사회 구조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해져야한다. 모자란 최저임금의 이면에는 영세 자영업자들을 더욱 영세하게 만드는 경제 구조가 있다.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개혁으로 논의는 확장돼야한다. 가령 최근에 논의되는 최저임금 1만원 운동에서 ‘1만원’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의 의의는 한국 경제 전반의 개혁을 위한 협상패라는 점에 있다. 최저임금 그 이상을 말하기 위해서 최저임금 얘기를 꺼낼 때, 정치적 담론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야한다.

 

필자 소개 | 귀염둥이원숭이몬 : 언론에 회의적인 기자 지망생. 필자명이 엉망인 이유는 귀여운 것을 대체로 좋아해서다. 부족한 글을 실어주는 잠망경에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

코너 소개 | 몽키온더트리 : 사안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한 차원 위에서 조망하려는 코너. 숲 전체를 살피기 위해 나무 위에 오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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