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뭘까] 떡 썰기와 권태, ‘수렴’ 지점에서

나는 그 차이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지 못했고, 반복이라는 상징에 빠져 이것이 다 권태가 찾아오는 ‘유통기한’의 문제라며 다른 관계를 찾아 떠났다.

연애몰까2

| 구구

 

기다란 가래떡 썰다가 음모론에 빠진다. ’이 칼질이 ’과거’와 ’현재’같은 시간 개념을 만들지 않았나?’ 기다란 가래떡 한번에 삼키는 일이란 어렵고, 시간은 무한하게 증식하는 직선이다. 잭의 콩나무에서 현재라는 기다란 시간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그것들을 토막 내지 않으면, 우리의 하루란 얼마나 불안한가. 모든 가게는 하루 한주, 한 달로 ‘마감정산’이 필요하고, 우리는 무한한 시간을 반복의 서사로 만들고 싶다. 기다란 시간의 직선 그 양 끄트머리를 모아 원을 (영차영차) 굴리며, 하루 한주 한해는 흐르고, 동시에 만들어진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아닌가. 이 ‘참’인 명제에 우리는 가락을 붙이고, 반복의 서사로 삶을 노래하지만, 우울한 진실을 지울 수는 없다. 반주가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도는 ‘물레방아’. 물의 유속과 유량이 이따금 물레방아의 속도를 조율할 뿐, 궤도 바깥으로의 탈구는 불가능하다. 어제 돌았던 그 자리에서 똑같이 오늘도 도는 모습을 보며, 삶의 물레방아 된 곳은 권태를 맞는다.

현실이 권태로 길든다면 ‘닿을 수 없는 과거의 것’에 대한 욕망이 찾아온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썰어본 적 없는 떡을 욕망하는 병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아름다운 시절과 그때의 사람들, 그때의 대학, 그때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없어진 것들에 대한 욕망’. 전혀 새롭지 않다. 삼청동 한옥을 향한 욕망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한옥을 사라지게 만든 후에야 가능했다. ‘청년’을 아름다운 시기로 찬미하는 서사는 대부분은 이제 더 이상 청년이 될 수 없는 이들로부터 출발했을지 모른다.

해답은 뭐지? 노래 ‘물레방아 인생’ 앞 구절이 ‘정처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였다. 떠날 시기가 지나버린 것인가. 무언가를 권태로 길들이고 이내 공간에서 떠나 “정처없는” 것이 답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래서

“또 혼자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날카로운 소리가 꾸리꾸리한 생각들을 파쇄했다. 부서진 것들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 마디가 이어졌다.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넌 언제나 똑같아.” 싫다. 반복과 권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공상에서 나를 깨우는 소리마저 “언제나”라는 ”반복”의 단어였다. 이 관계마저 권태의 늪으로 떨어지는구나. 그래, 다 이렇게 될 일이었다. ‘권태기’는 원래 ‘연애’라고 이름 붙은 관계의 한 종류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그것도 병명처럼 불리곤 하는 증상 아닌가.

‘또 그 소리야?’

꾸리한 생각의 조각을 애써 다시 모으던 때를 돌아본다. 나는 그때 다른 의지가 필요했다. 분명 지지난달에도, 지지지난달에도 너는 같은 문장이었지만, 매번 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그 차이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지 못했고, 반복이라는 상징에 빠져 이것이 다 권태가 찾아오는 ‘유통기한’의 문제라며 다른 관계를 찾아 떠났다.

 

‘수렴’ 지점으로 권태

나와 사랑하는 너의 관계에서 자꾸 ‘그때의 것’이, 반복이 뵌다. 비단 너와의 관계뿐만 아니다. 복학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이미 두렵다.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가 들어서고, 몇 주년인지 기념관이 들어선 학교에서 그 외 차이를 찾긴 힘들 것이다. 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강의실과 건물 안과 밖으로 밀물 썰물 하는 것을 보는 일이 두렵다. 그럼에도 ‘반복’이라는 인식 속에서 놓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한번, 헤어진 사람은 다시 같은 이유로 헤어진” 다는 연애서의 결론이나 무릇 평론가들의 “신자유주의화 된 개인의 삶 양식”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곳은 우리 연애의 모든 문제가 ‘수렴’하게 된 지점이나 이데올로기가 낳은 관계들의 비참한 결과로서 ‘수렴’ 지점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곳에선 다른 의미들이 탄생하고, 그때와 다른 운동이 존재해 왔다. 사랑하는 너와의 관계 역시 그때와 ‘같음’을 찾으려는 의지에 가려진 ‘다름’이 있었다. 조금씩 관계들에 낙관을 내어주는 것은 차이를 발견하게 하고, 변화한 상황 속에서 머무른 나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 계속해보겠다는 의지와 실천의 출발점이 된다.

반대로 회귀와 반복의 서사가 오늘을 잠식할 때, 변화와 실천에 대한 의지를 모두 상쇄할 만큼의 회의와 비관이 등장한다. 더욱 문제인 것은 손 놓은 비관이 계속되는 동안 어두운 이데올로기는 계속해 증식하고 지배 헤게모니는 공고해진다. 반복이란 쉬운 상징은 관계를 미화했다. 아름다운 것으로서의 미화가 아닌 ’회화화’.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논의는 그 상(image) 앞에서 모두 사라지고, 발 디딘 현실이란 이제 들여다보며 의미 찾는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서, 지금 가장 그리운 관계의 이름에서, 반복된 연애에서, ’너는 여전히 똑같다’는 목소리에서 차이를 찾아냈어야 했다. 그 시작은 물론 나를 향한 의심과 성찰이었고, 내가 시간을 토막 내는 칼잡이, 서사를 통제하는 소설가가 아님을 인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고 ‘관계’에서 플레이어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나는 그때 그 사람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못했다. 그랬다면 조금 더 좋은 관계를 만들며, 권태 뒤편의 어두운 나를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무언가를 반복으로 ‘상징화’하는 건 그것을 결과로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맥락이 주는 역동성을 보는 데에서 출발해야 했다. 더 일찍 좋을 수 있었고, 덜 괴로울 수 있었다.

 

∗ 필자 한 줄 : 미숙하고 어색하면서, 엉터리인 사람이 nerd라면, 사랑의 주체로서 나는 nerd다. nerd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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