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환의 무방비도시] 어디가 바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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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 재앙 안에 우리의 ‘불’을 더 이상 놔둘 수 없다는 것을.

|홍주환

‘박근혜 게이트’는 ‘허구의 현실’이다. 민주주의라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허구일 뿐. 현실은 비리와 유착, 부패였다. 날이 갈수록 민주주의가 허구였음이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실패하더라도, 기필코 민주주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박근혜가 퇴진한다고 해도, 남은 길은 아득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꼬일 대로 꼬여버린 지금을 고칠 수 있을까. 민주주의를 허구가 아니라고, 현실이라고 믿게 될까.

폐허는 원인이 없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만큼 지금의 상황을 잘 이야기해주는 허구가 있을까. 대재앙에 내린 이후 지구의 상황. 문명은 파괴되고 거의 모든 생명은 절멸했다. 여남은 인간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인간을 잡아먹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희망이 사라진 세상이다. 왜 이러한 저주가 발생했는지 코맥 매카시는 한 줄의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재앙의 흔적만을 묘사할 뿐이다. 텅텅 비어버린 집과 상점,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생존자들, 생명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대지.

왜 이렇게 됐을까. 인간은 참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말이다. 각종 죄악을 저질렀지만, 죄악을 막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었고, 교회도 꼬박꼬박 가면서 죄를 고백하며 인생을 참회하기도 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이러한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 “열심히 살았는데, 이따위 결과라니….” 지금 우리의 마음도 비슷하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는 이 지경까지 와 버렸나.

코맥 매카시가 대재앙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듯, 지금 대한민국을 덮친 대재앙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재앙의 흔적들만이 즐비할 뿐이다. 민주주의가 뭔지조차 모르는 무능한 대통령, 대통령과 함께 국민을 착복한 최순실과 일당들.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봤으면서도 이를 방조한 정치인과 공무원들. 사익을 위해 공익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재벌들. 진저리가 쳐진다. 그동안 아등바등 살아보려 했던 삶이 결국 이런 꼴을 보려고 그랬던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로드』의 황폐한 땅 위에, 더 이상 신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제 그들에겐 밥은 신이고 배고픔은 곧 악마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죄악은 그러므로 더는 죄가 될 수 없다. 그 묵시록의 시공간에서 오직 아버지와 어린 아들만이 어렴풋한 목표를 지닌다.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가는 것.’ 그러나 왜 그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단지 바다에는 생명이 있으리라는 희망만이 그들을 이끈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왔다. 10월 29일부터 시작된 촛불 시위는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 힘들다. 모두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고 이 국정농단의 가담자들이 처벌을 받으면, 사회가 좋게 변할 것이라 믿고 있는가. 슬라보예 지젝은 2005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폭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천 대의 자동차가 불타고, 대중의 폭력이 대규모로 분출했다. 그것이 그토록 놀라웠던 점은 시위대들 사이에 어떤 유토피아적인 전망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2005년 프랑스 폭동의 상황이 현재의 광화문 시위는 질적으로 다르다.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은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비폭력을 지향하고 박근혜 퇴진 이후를 바라본다. 허나 그 분노가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와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가’, 『로드』의 바다는 남쪽으로만 가면 나오는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고, 공무원과 재벌들이 처벌받아도 유토피아는 아직 먼 이야기다. 전경련을 해체해서 정경유착이 사라질지는 미지수다. 재벌은 여전히 거대하다. 지금 검찰이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예외적인 사례다. 정치권은 여전히 국민의 부름보다 권력욕에 먼저 반응한다. 어떤 학자들은 지금의 모습을 보며, 박정희 시대 혹은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서 원인을 구한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이 사회가 계속 꼬여왔다면,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현재의 분노는 어디로 가야 바다가 나오는지를 모르겠는, 전망 없는 허무함에서 기인한다. 『로드』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죽이면서 위기를 극복해나갔듯, 우리는 그저 그악스러운 거악을 도려내며 또 하나의 위기에 맞서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어떻게 해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국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일궈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허구가 끝나도 불을 꺼트릴 순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우리라고 말했지만, 그에게 불은 아들 자체다. 아들은 그가 살아있는 이유이며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희망이다. 그래서 아들을 바다에 데려다 놓겠다는 의지는 곧 희망이라는 불을 꺼트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이 바다를 마주하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죽고, 아들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곧 다시 다른 이가 나타나 아들의 가족이 되어준다.

소설 이후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소설이라는 허구가 끝나고도 소설 이후를 상상하는 것은 곧 그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들은 새로운 가족과 함께 바다에 도착했을까. 희망을 품고 싶다. 아들의 새로운 가족은 죽은 아버지가 그랬듯, 아들을 노리는 자들을 물리치고 바다로 향할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가 바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쪽으로만 간다면 언젠간 바다가 나오리라는 희망이 여전히 유효하기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말도 안 되는 ‘허구의 현실’이 끝난 이후를 상상하자. 지금의 촛불은 비록 꺼지지만, 누군가는 촛불을 이어받을 것이다. 당장 지쳐 쓰러져 더 이상 불을 옮기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우리의 자리를 대신해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바다를 향할 것이다. 비록 어디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인지 알 수 없다. 유토피아적 전망은 생각하면 할수록 깜깜하다. 그러나 땅 끝까지 가다보면 바다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 재앙 안에 우리의 ‘불’을 더 이상 놔둘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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