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하고자 소통을 말하면 소통이 난망해지는 소통을 위한 ‘소통의 재구성’

지금은 ‘소통’을 재고해야 할 때라고 붙인다. 우리는 소통이 학우 간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이 아닌, 학우들 간의 간격을 과장하는 언표가 아닌지, 비권/운동권과 같이 차이를 생산하는 언표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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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구

 

올해 총학의 이름은 ‘응답하는’이었다. 응답은 타자에 대한 반응이다. 학우들의 이야기에 반응하겠다는 저 총학생회는 결국 소통을 실현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내년 총학생회 당선자 sketch up 선본 역시 출마의 변과 당선 소감에 각각 “0순위는 소통”과 “소통하는 중앙대”를 강조했다. sketchup의 정책자료집은 다양한 ‘소통’의 총체다. 그것은 “오프라인에서의 소통”이기도 하며, “서로 소통”이다. “자유로운 소통”과 같은 “새로운 소통”이 목표다. 구조조정 문제에서 소통은 “진솔하게 소통”이고, 커뮤니티 중대 중심의 정상화를 통해서 “편리하게 소통”을 이룩해야 한다. 21페이지의 소책자 정책자료집에 소통은 13회 등장한다. 몇 해째 학생대표자들은 소통을 강조해왔다. 모두가 합의하는 가치이면서도, 구체적이지 않다. 이 모호함은 때론 유용함이다.

최근 중앙대학교의 언론들은 이 모호한 언표로 인한 피로감과 기만을 짚었다. 중대신문은 지난 11월 27일 <소통 난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 의미도 모호한 소통 일변의 정책구성을 비판했고, 11월 20일에는 <공약을 위한 공약은 의미 없다>라는 기사를 통해 “화이트보드를 설치해 학우들 간 소통 공간”을 만들겠다는 정책이 “뚜렷한 목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교지 ‘중앙문화’에는 응답하는 총학생회에 대한 비판 글이 실렸다. 기사를 통해 김서윤 편집위원은 올해 총학의 ‘응답’을 “쇼윈도”라고 평했다.

‘그래서 소통이 나쁘냐?’는 의문은 가능하다. 하지만 생산적이지 않다. 당연 소통은 나쁘지 않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소통은 유효한 구호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대표자들, 탑다운(topdown)의 의사결정 구조는 가정, 기업, 학교를 막론하고 드리워있지 않나.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소통의 문제인가’라는 것은 차치하고, 오늘날 수많은 문제들이 소통의 틀을 통해 가시화되고 있다. 그 보편적임 때문에 위협성은 것은 반감하지만, 올해 이화여대 투쟁을 비롯해 12월의 광화문 집회까지 비정치적이라며 비판받았던 사안들이 되려 정치적인 결과를 가져주는 모습을 목도하지 않았나.

좋은 소통, 나쁜 소통, 참인 소통과 거짓인 소통의 문제는 잠시 젖혀두고자 한다. 그 대신에 소통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떤 효과를 내고자 사용했는지. 소통은 어떤 문제들을 가르는 틀이었는지. 를 질문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서로 막힘없이 통한다”는 사전적 의미 뒤, 구성된 것으로서의 소통과 현실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소통을 생각해보자.

소통의 봄

소통으로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에 검색 시 2,476건이 잡힌다. 소통에 관한 연구 역시 2000년대 중반 이후 급증했다. 학술전문데이터베이스 디비피아에 소통을 주제어로 검색 시, 2003년 234편, 2005년 4122편었던 연구 양이 2013년 1,208편, 2014년 1,210편 2015년 1,145편으로 눈에 띄게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최근 두어 달 동안은 매주 저녁 뉴스에서 반-소통인 “불통”이 등장했다. 임기 내내 “불통”의 꼬리표를 달았던 대통령은 끝까지 소통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저 언표의 힘을 증명하는 데 힘을 보탰다.

바야흐로 소통의 봄이고, 대세는 소통이다. 소통은 오늘날 많은 문제에 해답으로서 기능한다. 기업은 소통을 통해서 혁신할 수 있고, 국회와 정부는 소통을 통해 훌륭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할 수 있으며, 세대 간의 문제는 소통을 통해 풀 수 있다. 대학 내에서 줄곧 소통은 “민주적인 의사소통 과정”을 통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특히, 대학 본부를 향해서 소통은 권위주의적인 의사소통 과정에 대한 비판을 담지한다. 일례로 지난 4월 구조조정을 향한 학생대표자들의 문제 제기는 무엇보다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중점으로 겨냥한 채 이뤄졌다.

이런 점에서 소통은 다른 문제일 수도 있는 것들을 점유하기도 했다. 때문에 “왜 이것을 소통의 문제로 말하고자 하는가?”라는, 현실을 문제화(problematization)하고, 재구성하는 틀로서 소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학생자치와 소통

학생 대표자에게 소통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소통이 학우들을 어떻게 구별지어 왔는가, 혹은 어떤 맥락에서 소통은 학생 대표자를 구별 짓는 틀이 되었는가. 학생대표자와 학우들의 관계의 경우 우리는 하나의 경유 지점을 지나쳐 사고해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반복된, 운동권과 비권이란 상을 두고서 말이다.

세기 말, 비-운동권을 의미하는 비권이 학생자치조직 내에서 운동권을 밀어내는 모습을 언론은 주목해 그렸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려를 담지하거나, 때론 신화화하며 비권의 등장을 전달했다. 마치 ‘x세대’나 “신세대”가 겪었던 것처럼. 그 시기들을 설명하는 언표들, 신자유주의와 권위주의적 권력의 종말, 문민정부로의 이행, 소비사회의 도래와 같은 수식 속에서 비권은 ‘시대의 새로운 것’이라는 상과 함께 등장했다.

비권의 모든 것은 그 준거점에 운동권을 둔 채 의미화 되었다. 새로운 것에는 위계적인 구조, 권위주의적인 모든 것에 단절을 고하는 상(image)이 부여되었고, 이는 반대편의 운동권을 소통의 부재로 단죄했다. 언론은 운동권에 안녕을 고하는 비권과 학생여론을 주목했고, 권/비권을 구별하는 단어로 소통이 등장했다. 1996년 4월 16일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멀어진 학우들 곁으로’ 문턱 낮추는 총학생회>는 “학생과 ‘따로 움직이는’ 총학생회는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언론사는 학생사회의 이런 움직임을 총학생회가 “학생들에게로”라고 향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이것을 총칭하는 단어는 “의견수렴”이었다.

90년대 기술적인 것에 발맞추는 정책들이 나왔다. 전북대, 원광대를 비롯한 전북지역 10개 총학생회는 1996년 “음성사서함을 설치하고 pc통신에 학생회란을 개설”했다. 이렇듯 마련되는 의견 수렴의 장치들은 ‘배후’라는 운동권의 상을 지워내고, 그 대신 ‘진정성’을 집어넣는다. 이로써 “학우들에게” 다가가는 학생회라는 의미화 과정이 완수된다.

2000년대와 2010년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자치조직들은 커뮤니티를 개설하고,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 총학생회와 대학본부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 커뮤니티 홈페이지를 개설해왔다. 커뮤니티는 그 자체로 학생들 ‘간’의 소통의 장이기도 했지만, 총학생회나 대학본부 등 권력을 쥔 집행기관과 ‘학우들’의 소통을 위한 창구 역할 또한 수행했다.

가시화된 소통의 장은 정책 입안과 행위자에게 ‘진정성’을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특정 커뮤니티들은 그 여론이 학우들을 대표할 수 없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대학본부’에서 운영하는 커뮤니티 ‘중앙인’은 학교를 비판하는 의견들을 검열했다는 사실로 그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총학생회는 여전히 ‘진정한’ 커뮤니티를 만들어낼 의무가 존재하는 것이다. 중대중심을 정상화고, 대나무숲을 관리하고, 소통하는 총학생회로서 가시적인 창구를 확립하는 일이 지금의 총학생회에 필연적인 이유다. ‘배후’를 지우는 일, 그것은 운동권이라는 호명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소통이 구별 짓는 것

‘소통’은 그래서 학생 대표자들을 비권과 운동권으로 구분하는 지점의 역할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비/운동권의 범주가 지니는 힘은 2014년 총학생회였던 “좋아요.” 선본이 그들의 당선 사유를 “비권”이기 때문으로 돌리는 모습에서 관찰된다. 이들은 중대신문과 진행한 당선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당선 사유를 “비권 총학생회를 원했던 것 같다” 고 밝힌다. 운동권과 비권의 구별을 문제시하는 지적이 이어지지만 “대다수 학우분들이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모호한 “운동권”이나 “비권”의 범주로 당선의 영광을 돌리는 저 총학생회장의 인터뷰에 2011년 사회과학대 1대 학생회장 박준성의 코멘트는 시사점을 던진다. 그는 2012년 총학 선거를 앞두고 중대신문이 실시 한 대담회 중 “비운동권의 경우 자신은 비운동권이기에 강하게 의견을 말해야 할 때 주춤한다”고 이야기한다. 운동권일 경우엔 “운동권이기에 무리해서라도 강력한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붙인다.

여기서는 “비운동권이기에”라는 규범이, 또는 “운동권이기에”라는 규범이 각각 비권과 운동권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재고하게 하는 하나의 억압적 권력지점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소통’은 운동권 혹은 비권이란 부여받은 범주 속에서 숙고해야 하거나 때론 무시해야 하는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이들이 가시화될 때에는 ‘소통하는 운동권’이나 ‘소통하지 않는 운동권’으로 표상되게 되며 운동권/비권이라는 준거점에서 ‘거스르’거나 ‘합치하는’ 이들로서 표현된다.

안타까운 순간 역시 관찰된다. 통찰을 보여준 2011년의 사회과학대 학생회장 박준성은 이후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다. 허나 운동권/비권이라는 범주가 지닌 억압을 지적했던 그 역시, 소위 ‘운동권 프레임’으로 끌어들여지게 된다. 학교 내에서 다른 담론주체들이 그에게 여전히 운동권이라는 틀을 통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중대신문>은 2013년 11월 총학생회장 선거를 앞둔 인터뷰에서 박준성 후보에게 “학내에선 운동권에 대한 거부반응이 많아 보인다. Brand NEW선본을 운동권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묻는다.

“운동권”도, “운동권에 대한 거부반응”이라는 여론도 의심되지 않은 사실이 된다. 구태여 “Brand NEW 선본을 운동권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고 덧붙이는 이유는 무얼까. 학내 언론이라는 담론 주체에게 운동권은 무엇을 의미할까. 혹시 학우들이 궁금한 것을 전달해야한다는, 그리고 오직 익숙한 틀을 통해 설명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대학언론에도 역시 ‘배후’라는 그림자를 지우고 ‘학생들에게’로 향하는 비권언론의 사명을 짐 지운 것일까. 비권/운동권의 담론을 그대로 가져다 쓴 많은 대학언론들의 성찰 없는 저널리즘은 분명 저 억압적 틀의 계승됨에 책임이 있다.

결국, 비/운동권 틀이 지닌 억압 효과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학생회장이 운동권의 무언가를 설명-혹은 해명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여기서 박준성은 운동권의 문제로 “의견수렴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소통의 부재는 다시 운동권의 문제가 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소통”은 학생대표자들을 두 축으로 가르는 문제적 언어로 다뤄져 왔다. 질문이 달랐다면 다른 답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대학의 각 주체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비권/운동권의 틀이 계승되며 소통은 그렇게 구별 짓기, 혹은 배제의 수사가 되어가지는 않았는가.

이 글의 한계, 소통의 재구성

사실 이 글은 많은 부분에서 ‘편향’되어있다는 지적을 받기 충분한 졸고다. ‘소통’이 지닌 선한 의지들을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으며, 일면에서는 ‘음모론적’인 태도를 취한다. 학우 간의 격차를 강조하는 담론들 속에서 소통은 ‘서로 닿고 싶은 우리의 억압된 욕망’을 자극하는 언어다. 그 때문에 소통은 특정 영역의 문제에서 주체들을 운동 내부로 포섭하기에 유용한 언어가 될 수 있으며, 꾸준하게 불릴 이유가 있다. 또한, 커뮤니티의 경우 학생들에게는 일상의 유효한 정보를 얻는, 총학생회 차원에서는 정책의 입안과 실행 과정에서 학우들에게 밀접한 효과와 접근성을 높이는 데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다. 여전한 권위주의적, 수직적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소통은 의미를 지닌다.

이를 전부 수용하면서, 지금은 ‘소통’을 재고해야 할 때라고 붙인다. 우리는 소통이 학우 간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이 아닌, 학우들 간의 간격을 과장하는 언표가 아닌지, 비권/운동권과 같이 차이를 생산하는 언표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선거가 끝나고 당선된 총학의 정책자료집을 다시 들여 봤다. 8페이지의 06공약 <교내 일방적 구조 조정 적극 대응>의 “학교와 교수진 그리고 학생 세 집단이 진솔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공청회를 개최하여”에서의 소통을 논쟁으로 바꿨다면. 07번 공약인 <중대중심사이트정상화>의 “중대중심 사이트의 정상화를 이룸으로써 학우들이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의 소통을 정치가 대체한다면. 13페이지의 3번 공약 <화이트보드 설치>를 통해서 이룩하겠다는 “자유롭게 소통”, “소통의 장”, “새로운 소통”의 소통 자리에 운동을 넣는다면.

그랬다면 (1) 바꿔 쓴 문장이 너무나도 말이 되기에 한번 놀랄 것이고, (2) 자연스레 이 총학생회를 운동권으로 생각해서 두 번 놀랄 것이다. 맞다. 소통이 문제인 영역이 분명 있다. 허나, 다의적이고 모호한 성격과 달리, 대학사회에서 소통은 매우 분명한 효과를 지녀왔다. ‘학우들을 위한 소통’과 <소통 난무>, “쇼윈도”의 사이. 우리는 소통에 무엇을 투사하고 소통은 우리의 무엇을 재구성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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