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좀 더 정치적인 일상, 우리가 한 번 해보지, 뭐!

일상의 호흡으로 보다 정치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나의 이야기에서 사회 문제를 연결해 우리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만들어지며, 그 공통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끈질기게 문제를 말하고 해결하길 기대한다.

| 혬

안녕하세요. 저는 서라벌호 O층에 있는 OOO입니다.

2014년 겨울,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물음에 그렇지 못하다고 답하는 자보가 법학관을 가득 채웠던 즈음 나도 한켠에 내 이야기를 적어 붙였다. 아마도 바로 그 날이었나, 페이스북 페이지에 자보를 모아보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해 본 경험도 있으니 ‘뭐, 그거야 해볼 수 있지’ 하고 시작했다.

학교를 돌아다니며 자보 사진을 찍거나 메시지로 받은 자보를 올리다가 자보를 쓴 사람들을 한번 만나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자보가 말을 건다>라는 이름으로 페이스북에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올렸더니, 사람들이 진짜 모였다. 활자가 얼굴로 나타났고, 그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학내에 안녕하지 못한 청소노동자를 만나러 가자고 이야기가 나왔고, 본관으로 향했다. 그때 청소노동자조합이 출범한 뒤 학교 측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 본관을 점거하고 있었다.

행정실에 둘러서서 우리는 인사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무슨 과 누구라고 이야기하자 청소노동자분들은 어느 건물 몇 층을 청소하고 있는 누구라고 소개했다. 자기소개를 했을 뿐인데 누구는 미안하다고, 누구는 고맙다고 울었다. ‘노동 조합원’보다는 구체적이고, ‘사회문제’보다는 입체적이었다. 그 얼굴들과 이야기를 만나는 게 좋아서 바쁜 겨울을 보냈다.

세월호 이후, 광장에서의 무력함

안녕하지 못했던 겨울을 지나 봄이 왔을 즈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설마 했던 모든 시간이 허무하게 지나버렸다. 세월호 사고 후 100일이 되기 전 주말,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기로 한 김에 집회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했다. 두 친구에게 집회는 처음이었다.

언제나처럼 집회에선 멀리서 온 사람의 소개가 이어지고, 구호를 외치고, 잘 모르는 노래를 불렀다. 한 친구가 자신은 보수 언론에서 왜곡하는 진실에 대해 분명하게 반박하고 설득하는 자리일 줄 알았는데, 왜 계속 공연만 하냐고 물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집회에 나가 그러려니 하던 나에게 당황스러운 질문이었고 설명할 답을 못 찾았다. 친구들은 약속된 일정과 기대에 못 미치는 분위기 탓에 먼저 자리를 떴다. 혼자 늦은 저녁까지 자리에 있는데 무대 위 사회자가 곧 돌아올 100일째 되는 날에는 몇만 명을 만들어보자고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 함께 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행진을 시작했는데 금세 길이 막혀 서성이다 집에 돌아갔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도로에 나가지 말고 광장에 머물러 여기 모인 사람들이 누군지, 왜 왔는지,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도 서로 이야기하고 경험을 나눌 수 없다면 오늘 내가 느낀 감정처럼 황망하기만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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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테이블을 펼치고 만난 사람들

희망제작소에서 개발한 툴킷 노란 테이블이 있다는 사실은 안 건 아마도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바로 희망제작소에 연락해 찾아가 어떻게 진행할 수 있을지 배웠다. 내 목표는 10명이 모인 10개의 그룹을 만들고 광장에서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비 소식이 있었다. 결국, 빈 몸으로 집회에 갔고 광장에 있다가 도로로 나갔고 막혀서 서성이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는 아쉬워서 당시 일하고 있던 ‘만남 플랫폼 위즈돔’에 주말 낮 시청 광장에서 노란 테이블을 펼치고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올렸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한 번은 시청 광장 잔디에서, 한 번은 이순신 동상 앞 유가족 농성 천막 안에서, 한 번은 서울시 공유 서울 박람회 행사에서 노란 테이블을 펼쳤다.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데이트 나온 대학생 커플부터 공무원 조직에서 일하는 분, 특목고 교사, 보험 판매원, 상경 생활이 녹록지 않던 청년도 있었다. 각자가 원인이라고 생각한 것도 달랐고, 해결 방법도 달랐고, 약속도 달랐다. 다만 한 가지 같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너무 어려웠다는 거였다. 일 년 뒤, 동네 마을 도서관에서 소위 386 세대와 노란 테이블을 펼쳤다. 영업사원인 한 남성이 노란 리본을 달면 회사와 동료들이 나무란다는 말을 했다. 애도조차 불가능하고 리본을 다는 것도 일상에서 애써서 해내야 하는 게 괴롭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상에서는 세상에 별별 사람 많다는 걸 알면서도, 정치에서는 왜 그리도 무관심한 시민, 적극적인 시민, 깨어있는 시민 따위로 나눠 버리는 걸까. 생각보다 복잡하고 구체적인 사람들이 일상 안에서 이 사회 문제와 자신을 연결하려고 고군분투하지만, 혼자여서 어려워하는 순간이 많다. 함께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사회 문제와 연결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도 정치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 깊이 새겨졌다. 그러나 일상에서도, 광장에서도 요원하기만 하다.

한 번 해보지, 뭐.

박근혜 게이트 너머 모든 기득권이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10월 29일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였다. 그 날 정치스타트업 와글(WAGL)에서 일하는 정현 님이 페이스북에 집회에 대한 의견을 올렸다. 큰 무대보다는 작은 무대가 여러 개고, 보다 민주적인 집회 시위가 지속 가능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정현님한테 2014년의 경험을 말하며 뭐라도 해보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마침 같은 건물에서 일하고 있던 차라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에 우리는 업무 시간 중간 겨우 30분을 내어 만났다. 사람들은 왜 광장에 모이나, 어떤 경험을 하고 있고, 기대하고 있을까, 2~30대는 어떤 정치적 경험을 가졌나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개인의 마주침을 이끌어내는 집회 시위가 필요”하다는 합의를 하고, 페이스북에 <해보지, 뭐.>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려 사람들에게 기획 워크숍을 해보자고 했다. 글을 올리고 나서도 틈틈이 30분, 많으면 1시간씩 정현님과 모인 사람들과 무엇을 할지 이야기했다. 지금껏 방향과 대의를 정하고 사람들의 힘을 구했다면, 그 협의의 과정을 함께 하는 데 집중해보자고 했다. 그냥 ‘해보지, 뭐’하는 마음이었다.

이틀 뒤 80여 명이 신청하고 60여 명이 왔다. 먼저 정현님과 나 각자가 왜 개인의 마주침이 집회 시위에서 필요한지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고는 세 시간 동안 모든 사람과 함께 공간과 시간, 방식을 합의했다. 포스트잇으로 각자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모으고 비슷한 생각끼리 그룹핑한 다음, 투표권을 나누어 거수로 우선순위를 정했다. 동의할 때는 두 손을 올려 반짝반짝 손을 흔들고, 다른 의견을 말하고 싶을 땐 머리 위로 원을 그렸다. 밀도 높은 대화와 에너지에 쩔쩔맬 때, 이런 합의 과정을 만드는 데 직업인 참가자 한 분이 선뜻 도와주셨다. 우리는 “주말 낮, 유동인구가 많은 대학가에서 소규모 그룹 토론을 축제의 방식으로 해보자”로 합의했다. 이 간단한 걸 이렇게 애써서 합의할 필요가 있냐고 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이 과정 자체가 새로운 집회고 시위의 시작이라고 마음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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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뒤인 8일에는 우리가 해보자고 한 것들을 진짜 해보기 위해 세부적인 기획을 하러 모였다. 우리는 12일 민중총궐기에는 소규모 그룹 대화를 만들 수 있는 방식을 시도해보고, 19일에는 그 소규모 그룹 대화와 축제 방식을 녹이는 행사를 해보기로 했다.12일, ‘왜 거리에 나왔는지’에 대해 적는 피켓과 ‘왜 이 문제에 화가 났는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이를 위해 나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는 다섯 개 질문이 담긴 <오방색 주머니>를 만들어서 나갔다. 오후 1시부터 큰 스피커 소리를 피할 수 있는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 사이에 앉아 사람들을 만났다. 호기심에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고, 자리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있었다.

4·19 혁명 당시, 거리에 있었지만, 박근혜를 뽑았고 처음에는 거짓인 줄만 알았다가 이제는 자신이 잘못 뽑았다는 걸 깨닫고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거리에 나온 노인을 만났다.

4·19 혁명부터 지긋지긋하게 집회 시위를 했다는 여성운동가는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몸을 피해 독일에서 15년간 나갔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그 시간 동안 옥살이를 한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을 아직도 갚아 나가고 있다는 그녀는 “모든 사람이 다 나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전남 여수에서 혼자 올라온 청년은 이번에는 친구들을 설득하지 못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 더 많이 이야기하고 다음에는 함께 오고 싶다고 얘기했다.

100만 명이 모인 날, 나는 구체적인 다섯 얼굴을 만났다. 그 얼굴들을 만나고 나서야 그 이후를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 다음을 위해서라도 일상적 호흡으로도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어야 하며 정치적인 공간이 광장 너머 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다섯 얼굴이 공감한 내용이기도 하다.

흥미로웠던 건 화가 나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장 화나게 한 원인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잠시 얼어버린다는 거다. 당황한 웃음을 짓다가 화가 나는 일은 많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무엇 때문에 가장 화난 건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매일같이 터지는 많은 사건 안에서 ‘화’라는 감정은 쉽게 생기지만, 나의 일상, 자기 문제와 연결해 무엇이 원인이고 어떻게 해결하면 될지 고민하고 이야기를 꺼낼 기회는 많지 않다. 그 감정이 언어화되지 않는다면 감정이 사그라들고 잊혀지는 순간, 문제도 잊기 쉽다. 화난 이유를 알아야 그 다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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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에는 신촌 연세로 차 없는 거리에서 <이 시국에 뭐라도 해보는 축제>를 진행했다. 한 부분에서는 모여 <오방색 주머니>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한 부분에서는 연설문을 고치고 춤을 추고 마이크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박을 터트렸다. ‘주말 낮, 유동인구가 많은 대학가’인 신촌에서 사람들과 정치 이야기를 한다는 건 녹록지 않았다. 광화문 광장보다 관심을 갖는 사람도 적고, 앉기까지 좀 더 많은 설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얼굴은 더 다양했다.

논술 시험을 보는 딸을 기다리던 한 남성은 6월 항쟁 당시 연세로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 이후 노태우를 뽑지 않았냐며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를 지치게 하더라도 지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신촌의 빵집에서 일하고 퇴근하던 이는 박근혜를 뽑았던 자신을 후회하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일부러 찾아온 여성 세 명은 이미 지친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나오면 힘을 받고 희망이 보이는 듯해도 막상 일상으로 돌아가면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키우고, 박근혜와 별다를 바 없는 상사가 박근혜를 욕하고 있다는 거다. 일상이 달라지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세상은 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란 무기력함이 들지만, 세상이 살 만했으면 좋겠다고, 자신이 그 무기력함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하면서 말이다.

신촌 거리 한복판에서 ‘무슨 정치 이야기야’ 할 수 있지만, 안될 일도 아니다. 친구를 만나고 쇼핑을 하다가도 낯선 사람과 모여서 내 이야기를 꺼내어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지극히 사적인 경험들 사이에서 공통의 감정을 꺼내어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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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상상력은 가능하다.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친다. 150만 명 각자의 일상과 경험, 고민은 다를 것이다. 화난 이유도 다를 테고 퇴진 이후 기대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광장에서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고, 다음을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다. 몇 명이 모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그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어떠하냐는 거다. 주말마다 광장에 나와 시민이 되었다가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외롭거나 이야기하기 어려운, 평일과 주말 그리고 일상과 정치가 분리되어서는 지속적일 수 없다. 일상의 호흡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계속 마주쳐야 한다. 물론 더디고 어렵다. <해보지, 뭐.>도 60여 명의 사람에서 10여 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이전에 어떤 경험도 없던 10명이 뭐라도 해보겠다며 평일에도 만나고 만들어가며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일구고 있다. 일상 안에서 이야기하고 만들기에 우리는 치열하지만 느슨하고 열정적이지만 비장하진 않다. 그래서 이 경험은 좀 더 오래 이어질 거라 믿는다.

일상의 호흡으로 보다 정치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나의 이야기에서 사회 문제를 연결해 우리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만들어지며, 그 공통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끈질기게 문제를 말하고 해결하길 기대한다. 광장에는 하나의 구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수많은 이야기를 꺼내고 드러내는 작업은 이어질 거다. 우리가 한 번 해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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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 이 시국에 우리가 이 경험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 경험들이 일상에서 더 자주 일어날 수 있을지가 가장 관심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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