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S] 우리가 만나기 위하여

수많은 “당신”과 함께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라고, 약속하려고 합니다.

마리안1

| 마리안

매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DOR, Transgender Day Of Rememberance)입니다. 올해 18회를 맞는 TROR은 1998년 미국에서 트랜스포비아에게 살해당한 리타 헤스터(Rita Hester)에 대한 추모 집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차별, 증오, 폭력으로 세상을 떠난 트랜스젠더퀴어를 추모하며, “당사자 및 지지자들이 모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다시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얻는 자리”입니다.

서울에서는 연남동 숲길공원에서 촛불 추모회가 열렸습니다. 산책하는 강아지와 소풍바구니가, ‘힙’한 음악이, 여남 커플들이 흘러가는 곳. 나도 언젠가 저 중 한 사람으로 지나갔던 길에서, 7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습니다.

내가 놓여 있는 젠더/섹슈얼리티, 계급의 위치에서 페미니즘의 필요와 위로를 느꼈지만 여전히 나의 ‘몸’으로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 온전히 나의 ‘몸’에서 특권을 누리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내가 안착해 있는 규범/틀이 배제하고 추방하는 수많은 “당신들”이요.
그렇다고 해서 “나(i)”라는 주체가 견고하고 매끄러운 경계(이른바 ‘시스젠더’, ‘비장애인’과 같은)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인식의 틀과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불확실하게 구성되어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을 타자화하고 싶지도, “당신(you)”을 ‘트랜스젠더퀴어’라는 어떤 집단만으로 상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날 당신의 담담한 목소리 앞에 섰을 때 느꼈던 감정과 다짐을 고백하려는 것입니다. 다음날 또 다른 당신의 얼굴들1)을 만났을 때를 기억합니다. 발밑이 꺼지는 듯한 죄의식을, ‘살 수 있는’, 아니 ‘살 수 있는 삶으로 인정받는’ 삶에 대한 무거운 부끄러움을요. 어떤 이는 동성애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한 포럼에서 자신이 “진정한 인권”을 위해 “죽을 각오로” 임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지만, 당신이 실존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폭력과 죽음에 비하면 얼마나 얄팍한 은유에 불과한지요.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공감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더더욱 공부하고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술과 광장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목소리에서, 당신의 인생이 담긴 영화에서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소년은 울지 않는다(Boys Don’t Cry, 1999)>를 본다고 해서 내가 혐오발언과 함께 죽임당하는 트랜스젠더퀴어의 삶을 ‘공감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애와 재생산권 이슈를 공부하고 한다고 해서 내가 사회에서 출생부터 “거부당하는(be rejected)” 삶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 날 한시에 촛불을 들었다고 내가 당신의 “곁”이 되었다고 자언할 수 있을까요?

아뇨,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낯섦’이라는 먼발치에서 멈춰있기보다, 내게 주어진 “정치적 책임”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끊임없이 나의 위치를 사유하고, 불평등하게 분배된 취약성을 절감할 것을 다짐합니다. 수많은 “당신”과 함께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라고, 약속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광장에서 우리는 만나겠지요.
1) https://tdor.info/?ncid=fcbklnkushpmg00000050. memorializing 2016 TD0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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