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의혈의 새로운 비상을 기대하며…

이번 사태가 시민의 승리로 잘 마무리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 속에, 우리의 손으로 역사를,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줬으면 좋겠다.

의혈

|당근

지난 11월 26일, 중앙대학교 학생들이 효사정 앞에 모였다. 날씨는 냉혹한 현실만큼이나 추웠고 눈발마저 날리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전혀 춥지 않았다. 그 날 각기 다른 과에서, 아마도 서로 조금은 다른 심정과 분노의 정도를 안고 모였을 다른 학우들 역시, 눈바람을 가르고 올라가 휘날리는 ‘의혈 중앙’의 깃발을 보며 가슴 속에 뜨겁게 벅차오르는 무언가에 추위를 잊었을 것 같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와 민주주의 유린을 규탄하기 위한 범국민행동 의혈본부의 행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학을 다니는 2년 동안 종종 집회에 나가곤 했지만, 이날의 행진은 내게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단순히 ‘의혈’이라는 이름에 대해 중앙대 학생이 가지는 자부심 때문은 아니었다. 전에 느끼지 못한 특별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떨림은, 아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직접 맞서기 위해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발생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집회에서든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만 26일에는 조금 더 특별했다. 나와 같은 공간, 같은 집단 속에 있는 내 친구, 동기, 동문이 나와 함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에서 오는 떨림은, 이전에 집회에 참가해 봤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느낌이다.

효사정에서 주최 측과 참가자들의 발언을 듣는 순서를 가진 후, 한강대교를 건너 용산역으로 가는 1차 행진을 시작했다. 다행히 눈발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구호를 외치며, ‘의혈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경구를 가슴 속에 품은 채, 행진 대열은 한강을 건넜다. 한강대교 위를 지나는 강풍에 수많은 깃발들이 일제히 펄럭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발밑을 흐르는 한강을 보니 자연히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백남기 선배님이 떠올랐다. 신군부에 맞서 4,000인 한강 도하를 주도하셨던 백남기 선배님. 당신의 의지를 이어받아 한강을 건너는 후배들의 모습에 선배님 역시 하늘에서 기뻐하셨을 것만 같다.

용산역에서 1차 해산 후 종로 3가에서 다시 모여 광화문 광장 쪽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광장에 모인 사람이 너무 많아 광장에 진입하지도, 문화제를 관람하지도 못했지만, 의혈의 깃발은 멈추지 않고 광장 주변을 돌았다. 함께 구호를 외치며 지지를 보내주신 시민분들과, 깃발을 보고 다가와 격려의 한 마디를 건네고 가신 선배님들은 언제나처럼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우리는 항상 듣기만 했던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한 마디를 우리의 입으로, 자랑스럽게 외쳤다.

이번 행진은 과거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쳐 투쟁했던 학생 선배들의 뜻을 되살리는 첫 발걸음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대학생들은 사회 문제 해결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허나 ‘최순실 게이트’라는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맞아, 그간 쌓여왔던 대학생들의 분노가 적극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중앙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 행진에서 외쳤던 구호는 단지 ‘박근혜 퇴진’만은 아니었다.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을 비롯하여 재벌과 정계의 유착에 대한 문제 제기, 세월호 7시간 진상 규명 요구, 보수언론과 종편의 태도에 대한 비판 등, 사회 정의 실현의 열망이 담긴 많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부분들은 행진이 단지 박근혜에 대한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분노가 아니라, 부당한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증명해준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중앙대에서 학생들의 사회 참여가 다시금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또한 이날은 학생사회를 이끄는 조직인 학생회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하루이기도 했다. 자연대 학생회를 비롯하여 행진을 준비한 많은 단과대/학과 학생회들의 노력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대학 생활 동안 나가본 몇 번의 집회에서 중앙대학교 학생회의 깃발을 본 적은 없었다. 그 점이 항상 아쉬웠고, 또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 경찰의 부당하고 살인적인 진압으로 인해 쓰러지신 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비는 가두행진이 있었을 때도, 학생회는 그 안에 없었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총학생회에 대한 불만이 페이스북 페이지 ‘대나무숲’ 등지에서 많이 나타났다. 이번 행진은 비록 총학생회가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연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조직된 의혈본부가 나섬으로써 많은 학우들을 모을 수 있었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학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의무가 있고, 가장 많은 학생들을 모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학생회는 학생 운동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번 행진을 계기로 중앙대의 학생회들이 사회 참여에 적극적으로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민들의 노력은 박근혜 탄핵안 가결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번 사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들이 아직 남아있다. 시민들의 행동도 계속되고 있다. 의혈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지만, 한강을 한 번 건너는 것만으로 역사가 바뀌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우리가 부당함에 대한 분노를, 정의에 대한 열망을 의혈이라는 이름과 함께 마음속에서 이어나간다면, 역사는 반드시 바뀔 것이다. 이번 사태가 시민의 승리로 잘 마무리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 속에, 우리의 손으로 역사를,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줬으면 좋겠다. 불의가 나타나면 언제나 일어나 의혈의 손으로 역사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심어줬으면 좋겠다. 중앙대를 비롯한 모든 학생 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금 활발하게 살아나고,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변화를 위해 나서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앞으로는, 세상이 흔들리고 옳은 것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앞장서서 역사의 바람을 맞으며 펄럭이는 의혈의 깃발을 조금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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