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몰까] 나는 NERD다. 그런가? – 피고측 변호인 변론하세요.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나를 NERD라고 부른다.

구구4

| 구구

재판장님. 피고인 피고를 다시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저는 오랜기간 피고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오면서 그가 a를 말해야하는 상황에 b를 말하는 모습을 관찰해왔습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a를 말해야하는 상황에 b혹은 c를 말하면서도 속으로 ‘a를 말해야하는데…’ 라며 자책하는 일은 결코 소위 ‘일반적인’ 대화 실천과 구분된 무언가가 아닙니다.

저는 모든일에 가장 솔직하고 자연스럽다고 칭해지는 이들이 뒤편에도 계산이 자리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계산하는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실천은 어떤 타협과정이 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타협과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미 생각이 바깥으로 내비쳐지는 사람. 머리 속 톱니가 맞물리거나, 엇갈리는 소리가 큰 사람인 그의 특징은 과장되어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의 어색함, 생각과 행동의 부조화를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우리의 안온한 위치를 경계지었을지도 모릅니다.

NERD는 다른 모든것들과 마찬가지로 인종화되지 않아야합니다. 그들의 언어, 행동, 웃음과 삶의 모든 양태를 ‘NERD’란 한가지 단어로 설명하고자하는 의지에서 우리는 멀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꿈은 NERD라는 단어의 소멸입니다. 외부와 이질화하며 내부를 균등화하는 저 단어가 더이상 말해지지 않은 세계입니다. 아 그래서 NERD가 무엇이냐구요? 잠시만요..(뒤적뒤적)

헤어졌다.

또 헤어졌다. 꿈을 꾸었다. 나를 변론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NERD를 구형받고 피의자 석에 앉아있었다. 내 변호인은 말을 유려하게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행동과 생각의 부조화”와 “어색함”으로 설명했다. 이건 꽤나 익숙한 일이다. 주변에서 자주 그렇게 나를 불러왔다. 사실 나는 NERD로 불리면서, 그리고 스스로를 NERD로 정체화하면서 이따금 누군가를 속이는 듯한 감상에 빠지 곤 했다.

어떤 연애에서는 나는 NERD와 같아서 어떤 말을 어떤 타이밍에 던져야할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때론 나는 좋은 타이밍에 좋은 말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낯뜨거움을 수반해야 겠지만, 어떤 연애에서 나는 양식화된 실천에 능숙했다. 어떠한 눈으로 그사람을 바라봐야 할지. 어느 위치에서 걸어야 할지. 다음 마디에 무엇을 붙이고, 어떤 감탄사를 내어 너의 다음 문장을 기다릴지.

네가 어색함과 미성숙을 원하는 날이면, 나는 그것들을 연기하는 일에도 익숙했다. 너는 그런 나를 귀엽다고 말했다. 정말 줄곧 NERD를 연기했던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좋아했으니까. ‘어색함’은 쉽게 ‘덜 손이 닿은 것’이라거나 ‘진정함’으로 이어지곤 했으니까.

연애에서 이런 ‘진정함’ 같은 건 꽤나 큰 무기인 동시에 방패다. 방패. 실패와 잘못을 빗겨치는 단어로 ‘미숙함’은 애정어린 시선을 받아왔다. 아! 모든일에 매우 능숙한 사람이라면, 역설적으로 보다 이 NERD함에 주목하라. 필수적인 완급조절. 언제나 자연스러운사람이 보이는 한번의 머뭇거림은 편곡과 변주가 선사하는 감동을 닮았다.

연애의 과정 뿐 아니라, 연애의 끝에 역시 NERD의 이미지는 유용하다. 모두에게 익숙한 하나의 이미지는 많은 설명을 대체하지 않는가. 우리사이의 여러가지 일들을 복기하지 않아도, NERD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언표였다. 그렇다. 이 ‘사랑스러운’ 언표는 지난 연애를 하나하나 짚어볼 많은 기회들을 상쇄했다. 이리하여 나는 지난날 연애들을 서사화하며, ‘헤어졌다’와 ‘나는 NERD다’, 그리고 다시 ‘헤어졌다’를 도돌이표돌았고, 현실에서 탈각된 변론을 자유롭게 써내려갔다.

진짜 나는 없었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자주 ‘거짓’이 주는 특별한 감상에 빠지곤 했다. 그것은 ‘실은 이것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고백의 순간을 위해 수행되었을지 모른다. 거짓이 부여한 가책은 고백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지 않던가. 사실 이것이 거짓말이었어. 고백의 순간은 오롯이 참회만의 것이 아니었다. 여태껏 진실을 독점해왔던 것이 다름아닌 ‘나’였다고 선언한다는 점에서 기만이 주는 달콤함을 닮았다.

나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리고 여전히 진실은 내가 쥐고 있다. 이제 고백의 순간만이 남았다. 이 단계만 거치면 이제 나는 몇 안남은 죄책감을 털어내며, 기만의 달콤함을 누릴 수 있다. 헌데, 이것을 누구에게 털어놓지.

사실은 내가 다 속였던 것이라고. 나는 안전하게 NERD의 방패막이 안에서 지난 이별을 서사화했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내 변호사의 변론은 완벽했다고. 이제 이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그 거짓된 역사를 사실 내가 다 연기했던 것이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될텐데. 그런데. 누구에게? 누구에게 이야기해야하지. 정말 누구에게. 아.

아!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는 걸. 진실을 쥐고 있다. 나는 NERD가 아니었다. 휴지조각이 된 진실. 그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진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나를 NERD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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