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환의 무방비 도시] 개별성을 위한 패배

다니엘은 타인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지만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서는 혼자 싸우고 패배한다. 하지만 그 힘없는 패배를 눈앞에 둔 관객은 존엄하고자 노력한 인간의 개별성이 얼마나 빛나는 지를 느낀다.

무방비도시 다니엘

국가는 나를 무시한다
현대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국가인가. 물론 겉으로는 둘 다에 해당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보적이지 않다. 칼 폴라니가 말했듯 시장은 ‘자기 조절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알아서 작동하려는 근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경쟁과 독식은 시장의 기본원칙이며 상생과 평등은 자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시장을 방치하면 사회의 보호막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시장이 과도하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규제해왔고 그 일환 중 하나가 복지다.

하지만 복지는 어느덧 자본주의 구조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 같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저소득층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관공서 직원들은 항상 짜증 어린 목소리로 사람들을 대하며 돈을 주지 않으려 기를 쓴다. 인간의 존엄을 고려하지 않는 자본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실시하고 있는 복지이지만, 어느덧 인간은 복지를 받기 위해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이다. 또한 복지 시스템도 효율화와 비용절감이라는 자본주의적 목표를 띠고 작동하는 상황이다.

이는 다른 행정체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민 삶의 존엄을 보호하려 존재해야 할 행정은 어느덧 비용절감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서 멀어지고 그들을 통치한다. 저소득층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관공서 직원들처럼 혹은 컴퓨터를 쓸 줄 몰라 손으로 이력서를 써온 다니엘 블레이크를 비웃으며 모멸감을 주는 구직센터 직원들처럼, 이제 행정 그리고 국가는 개인을 ‘처리해야 할 대상’, 즉 객체로 바라볼 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인을 객체로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꽉 막힌 국가에 일침을 가한다. 사실 이런 영화는 뻔하고 뻔하다. 부당한 구조에 맞서 목소리를 드높이는 개인이라니. 그것은 분명 저항의 성공 여부와는 관련 없이 아름다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항 자체는 뻔해도 다니엘의 저항방식은 결코 뻔하지 않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다니엘의 저항방식에 있다. 다니엘은 국가가 결코 주지 않는 의료수당을 쟁취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관공서 사무실 밖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이라고 쓰며 저항을 시작한다.

이러한 방식은 낯설다. 파업이나 시위, 집회 현장에서 어느 누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저항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단체의 이름을 내걸며 자신을 숨긴 채 ‘나로서’가 아닌 ‘우리로서’ 저항한다. 다수일 때 저항은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개별성’이 잠시 사라지는 비용은 저항의 실효성을 위해 감수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저항의 효율을 위해 숨겼던 ‘개별성’은 사실 자본화된 국가가 그동안 개인을 객체로 전락시키며 삭제하기를 거듭했던 것이다. 국가는 개인을 개별로써 판단하지 않는다. 국가에 나는 나로서가 아니라 내가 소속된 소득, 직업, 지역, 정치색, 학력의 외연으로 판단된다. 그 행태는 경제‧정치‧교육 등 전 방위로 확장되는 중이다. 국가도 다니엘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어떠한 구체적인 처지에 있는지 귀 기울이지 않는다. ‘미혼모’인 케이티가 얼마나 절박한지도 마찬가지다. 단지 행정적 기준 아래 그들이 속한 소득, 연령, 직업 등이 부합하는지가 중요할 따름이다.

무방비 도시 다니엘2

무기력하고 존엄한 영웅
그러므로 다니엘의 방식은 이러한 국가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개별성을 도리어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간간이 케이티 혹은 주변 사람들과 소통과 위로의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다니엘이 의료수당을 받느냐 마느냐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만약 다니엘이 정녕 의료수당을 받기를 원했다면 그는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규합하거나 그를 도와줄 단체를 구하는 정치적 전략을 사용했어야 한다. 혼자 싸우는 것은 정말 비효율적인 수다. 실제로 영화에서 다니엘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의료수당 심사 결과에 항소하지만 복잡한 항소절차에 골머리를 앓으며 시간을 쓰고 심사결과 통보순서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또 행정기관과 통화하기 위해 두 시간의 연결 대기음을 듣고만 있다. 통화에 성공해도 또 다른 절차를 거쳐야 해서 순서를 기다리라는 통보가 온다. 결국 다니엘은 혼자서 기다리기만 하다가 결국 의료수당도 받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른다. 그의 저항방식은 이토록 무기력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결코 승리하지 못하는 저항방식을 통해 켄 로치는 급진 사회주의자로서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관객은 갈수록 지쳐가고 혼자인 다니엘을 보며 패배를 예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존엄을 발견하고야 만다. 그는 스스로의 싸움에서는 혼자 저항했지만 늘 케이티에게 힘을 준다. 케이티가 푸드뱅크에서 음식을 삼키다 울어버릴 때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 영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도 늘 적과의 싸움에서는 혼자다. 만약 영웅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고 다녔다면 영웅의 존재는 그리 빛나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은 타인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지만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서는 혼자 싸우고 패배한다. 하지만 그 힘없는 패배를 눈앞에 둔 관객은 존엄하고자 노력한 인간의 개별성이 얼마나 빛나는 지를 느낀다. 그리고 그 개별성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다니엘의 죽음을 보며 그가 영웅이었음을 깨닫는 때이다.

개별적 주체가 되기 위해
싸움에서 때로 승리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다. 대결의 승리 여부 따위는 제쳐놓고 적을 향해 무작정 달려갔던 돈키호테를 보며 우리는 그의 어리석음 너머에 있는 명예를 본다. 다니엘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서’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 국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인간임을 끝끝내 소리쳤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바보 같은 저항을 보며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사회를 만드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또한 혼자 세상에 맞서다 쓰러져갔을 무기력한 영웅들이 자신을 부품으로만 바라보는 구조에 저항했듯, 우리는 그들의 패배에서 ‘우리는 결국 자본의 객체가 아닌 사회의 주체여야 함’을 되새긴다. 추운 길거리에서 언 손을 비비며 서 있던, 지나가는 인파 사이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초라하고 평범한 다니엘 블레이크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웅은 우리의 옆에 있다. 역시 승리의 추억보다 오래 남는 것은 패배의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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